최근 저는 지난달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러브데스로봇 시즌3의 마지막 에피소드인 히바로를 봤습니다. 러브데스로봇은 총 9개 에피소드로 이뤄져 있으며, 각 에피소드는 독립된 단편입니다. 사랑, 죽음, 로봇이라는 아이디어만 느슨하게 공유하고 있죠. 그래서 어떤 것을 먼저 보시건 상관이 없습니다.
참고로 가장 많은 호평을 받고 있는 작품은 어긋난 항해와 오늘 소개할 히바로 입니다. 어떤 것을 먼저 볼지 고민이라면 두 작품을 먼저 감상해 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히바로는 알베르토 미엘고라는 스페인 감독이 자신의 오리지널 각본을 갖고 연출한 작품입니다. 이 감독은 러브, 데스+로봇 시즌1에서도 목격자라는 작품으로 참여했으며, 이 작품으로 에미상3개 부문에서 수상한 바 있습니다.
히바로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인 편입니다.
17분 남짓한 이 단편 애니메이션을 보고 크리틱스컷 팀 내부에서도 논쟁이 있었고, 작품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긴 논의가 있었습니다.
논쟁은 히바로에 대한 한 칼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일보에 기고된 칼럼에서 박신영 작가는 이 작품을 “식민지배를 사랑으로 포장한 낡은서사”라고 썼습니다.
다른 팀원은 이것이 명백한 오독이라고 주장했고
저는 작품 자체가 오독의 여지를 주고 있다고 반론했습니다.
왜 의견이 이렇게 갈렸는지에 대해 말씀을 드리면서, 히바로에 대한 해석과 비평을 해보겠습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밀림 속을 행진 중인 스페인 병사들. 그들이 어느 호숫가에 도착합니다. 그때 호수에서 홀연히 황금 비늘로 뒤덮인 세이렌이 나타나 소리를 질러 이들을 유혹하고, 군대는 모두 물에 빠져 죽습니다. 단 한 사람, 귀가 먼 기사만 빼고요.
이들은 서로에게 관심을 갖습니다. 세이렌은 자신의 소리에 유혹 당하지 않는 기사에게 관심을 갖고, 기사는 세이렌을 뒤덮은 보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이처럼 서로의 탐욕에 기반한 어긋난 믿음으로 시작된 관계는 폭력적인 결말로 치닫게 됩니다.
먼저 캐릭터에 대한 견해 차가 있었습니다.
팀원은 두 사람의 관계를 남미 대륙을 약탈하는 것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기엔, 세이렌이 지나치게 주체적인 인물로 그려졌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감독은 작품의 기획의도를 명료하게 설명합니다. 감독 인터뷰에 따르면 히바로는 유독한 관계가 비극으로 치닫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악어와 재규어가 먹이를 두고 싸우는 모습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것은 두 캐릭터들, 두 포식자들 간의 광기 어리고 유독한 관계다”라고까지 말하고 있죠.
작품 내에서도 세이렌은 그저 숲을 경유해갈 뿐인 군인들을 먼저 불러들이고 그들 모두를 몰살합니다. 기사가 세이렌을 착취하는 장면이 나오긴 하지만 결국 그것마저 히바로의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세이렌은 히바로보다 약하고 착취 받는 자가 아니라 강력한 저주의 힘을 가진 괴물로서, 서로가 서로를 착취하는 비극을 그렸다는 것이죠.
저는 이에 대해서 대체적으로 동의했지만, 동시에 캐릭터 디자인 측면에서 오독의 여지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넷플릭스에 올라온 비하인드 영상에서 감독은 세이렌을 디자인 할 때 인도, 아프리카, 아시아 등 여러 나라의 장신구들을 기반으로 최대한 화려하게 디자인 했다고 말합니다.
반면 영화 속 등장하는 군대의 병사들은 르네상스기 스페인 병사 복장을 기반으로 디자인 했다고 밝히고 있죠.
저는 세이렌을 국적이 불명확한 신화적이고 환상적인 존재로 그리면서, 스페인 병사들은 명확한 시공간적 좌표가 있는 존재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르네상스기 스페인 병사가 밀림에 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스페인의 남미 정복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연상 과정이며, 그렇기 때문에 위와 같은 오독이 발생할 여지를 감독이 사전에 차단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팀원은 이것이 남미라고 단정짓기에는 여러모로 불명확하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이를테면 이 작품의 경우, 배경 디자인은 감독이 실제로 취재한 북미의 숲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첫 장면을 비롯한 몇몇 장면에서 소나무로 추정되는 침엽수가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시공간적 배경을 남미로 한정 짓는 것이 아니라, 감독이 무국적 공간을 의도했다고 추정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거죠.
그러나 저는 『반지의 제왕』의 예를 들어 이에 대해 반박했습니다. 『반지의 제왕』은 흔히 ‘세계대전’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히곤 했습니다. 히바로와는 달리 누가 보아도 무국적 공간인 ‘중간계’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저는 반지의 제왕을 알레고리로 읽는 이러한 해석에 개인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해는 하는 편입니다.
무언가를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로 해석하는 이유는 인간들이 바로 이 현실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역사와 정치의 장 안에서 살아가는 동물이기 때문에, 작가가 의도적으로 창작한 산물의 결과인 특정한 예술작품을 역사와 정치의 장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관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때문에 설령 시공간적 배경이 남미인지 아닌지 애매하게 그려졌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오독을 피해가긴 힘든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한편 이런 의견 차이에도 불구하고 식민주의 관점에서 히바로를 해석하는 건 무가치 하다는 데에는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달랐습니다.
팀원은 이러한 오독이 작품에 새로운 층위를 부여하고 풍부하게 만드는 해석이 아니라, 반대로 작품의 의미를 협소하게 만드는, 본질을 빗겨 난 해석이기 때문에 무가치 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애니메이션이기에 애니메이션의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거죠. 애니메이션은 이상적인 경우, 한 프레임, 프레임이 모두 미술작품으로 기능할 수도 있습니다. 탐미주의적 작품은 아름다움 그 자체가 의도고 목적입니다. 역사적 맥락에서 해석을 하게 되면 그 아름다움이 반감된다는 것입니다.
한편 저는 비역사적이고, 비정치적으로 오직 순수한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이러한 탐미주의적 의도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탐미주의적 작품에 대한 역사적, 정치적 해석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역사적, 정치적 해석을 하는 이유가 뭘까요? 그런 해석을 통해 더 나은 역사, 더 나은 정치로 향해가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동물농장』을 전체주의에 대한 우화로 해석함으로써 전체주의를 비판하고, 그와 다른 역사와 정치를 꿈꾸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히바로를 식민주의에 대한 우화로 해석하는 것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작품 내외로 어떻게든 합당한 이유를 찾아내 해석해봤자, 역사와 정치와 무관한 예술지상주의적 유토피아를 꿈꾸는 이런 작품들은 결국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이 작품을 똑같이 식민주의에 대한 알레고리로 해석하면서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이 좋다고 하는 단평도 영어로 여럿 있었습니다. 똑같은 근거로 출발했는데 왜 이렇게 결론이 다를까요?
작가의 의도가 비역사적이고 비정치적이기 때문에 귀로 걸건 코로 걸건 상관없는 애매모호한 텍스트가 됐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역사적, 정치적 해석을 시도하는 경우엔 말이죠. 그래서 저는 탐미주의적 작품에 대해서 역사적, 정치적 해석을 시도하는 것은 무의미할 뿐더러, 비평적 자살행위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