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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이병현 Nov 30. 2022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불과 물의 노래

1.

나를 만지지 마라. 왜냐하면 내가 만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만짐은 너를 떼어놓음으로써 지켜주는 것과 같다. 사랑과 진리는 만지면서 밀어내는 것이다...너는 누구도 잡거나 붙잡을 수 없다. 사랑과 진리는 만지면서 밀어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접근은 만짐 그 자체 안에서 그것들이 우리 힘 바깥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    장 뤽 낭시의 『나를 붙잡지 마라 Do not hold on me』 중


2.

나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이것이 영화사에 기록될 만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최소한 히치콕의 영화를 레즈비언 서사로 ‘전유’해왔던 (허송)세월 만큼 향후 수십 년 간 이 영화를 자세히 다뤄야 하지 않을까? 이 판단은 영화 자체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영화가 지닌 야심의 문제에 더 가까웠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로라 멀비 이후 여성주의 영화이론의 핵심개념어 중 하나인 ‘응시’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날 볼 때, 나는 누구를 보고 있겠어요?”(1:05:28)라는 대사는 이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시선의 주체는 '모델'이다. 첫 장면은 이를 스승-제자 관계로 설정해 친절하게 풀어서 설명하고 있다. 촬영을 살펴보면 조금 더 명확해진다. 해당 장면은 그림 그리는 학생들을 클로즈업으로 잡으며 시작된다. 이때 외화면에서 그들에게 무언가를 지시하는 선생의 목소리가 들리는데, 카메라가 전환되면 다름아닌 선생이 학생들의 모델이었다는 사실이 미디엄샷으로 드러난다. 이는 영화가 앞으로 계속해서 보여줄 시선의 파워게임 문제를 암시하는 장면이다.


영화에서는 내내 화가와 모델 간에 시선을 둘러싼 주도권 싸움이 벌어진다. 재미있는 것은 화가인 마리안느가 주로 얼굴 바로 밑의 목까지 담길 정도로 클로즈업 된다면 모델인 엘로이즈는 가슴에서 허리까지 오는 미디엄샷(바스트샷~웨이스트샷)으로 주로 찍힌다는 사실이다. 싸움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처음부터 주도권은 모델인 엘로이즈가 쥐고 있다. 마치 선생인 마리안느가 자신의 학생들을 유심히 응시하며 무언가를 지시하듯이, 엘로이즈는 마리안느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그림 그려지는 대상이 그리는 주체보다 우위에 있다.


이를 역시 레즈비언 서사인 <캐롤>과 비교해서 생각해보자. 누군가 지적했듯,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는 오버더숄더 샷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오버더숄더 샷은 단 두 번 등장하며, 둘 모두 대화를 하는 장면이 아니라 환영을 바라보는 장면이다. 오버더숄더샷이 주로 대화 장면에서 사용되는 미디엄샷임을 생각해보면 이는 관습에서 벗어나는 촬영이다.


*환영으로 나타난 엘로이즈


영화사에서 대화씬을 찍을 때 이렇게까지 오버더숄더 샷을 의도적으로 피한 사례는 오즈 야스지로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레즈비언 서사를 다룬 또 다른 작품 <캐롤>과 비교해보면 이 점은 더욱 눈에 띈다. “'캐롤'에는 많은 오버더숄더쇼트가 나오”며, 이는 “사회의 시선 속에서 성 소수자인 그녀들이 어떤 위치에 놓이게 되는지를 포착”하는 장치이다(인용 글).  반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당연히 스토리상 공기처럼 주인공 둘의 운명을 감싸고 있는 가부장제의 존재가 느껴지긴 하지만, 이를 촬영방식으로 드러내거나 하지 않는다.


유이한 오버더숄더 샷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는 명백하게 튀는 장면이다. 무엇보다 두 환영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나타난 점에 주목해야 할 것 같다. 엘로이즈가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마리안느는 총 세 번 보는데, 정황상 마지막 세 번째 장면은 환영이 아닌 실제로 벌어진 일이라고 봐야할 것 같다.


*계단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직전, 포옹을 할 때 이미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다.


문제는 앞의 두 장면이다. 엘로이즈가 예지 능력자도 아닐 텐데 이 장면은 어떻게 성립하는 것인가?


3.

오르페우스 신화는 영화 속 해석에 따르면 금기의 대상이 지닌 마력에 관한 이야기다. 추억을 (돌아)보면 대상은 죽는다. 이것은 연인이 아닌 예술가의 선택이다. (돌아)보지 않으면 대상은 죽지 않는다. 이것은 예술가가 아닌 연인의 선택이다. 영화가 이런 해석에 은근슬쩍 끼워 넣은 전복의 씨앗은 에우리디케가 “뒤돌아봐”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는 마리안느의 말이다.


이 말은 세 번째 장면에서 재현된다. 이때 말은 외화면에서 들려온다. 그 청각적 신호에 따라서 엘로이즈는 뒤돌아본다. 여기엔 아무런 문제도 없다.


첫 번째 장면으로 돌아가보자. 둘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첫날밤을 보내는 시점이다. 아마도 세 번째 장면에서 내려갔던 그 계단을 올라와 마리안느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 기대되는 방으로 향하는 엘로이즈를 측면에서 찍는다. 아무런 조짐도 없이 엘로이즈가 왼쪽으로 뒤돌자, 유령 같은 모습으로 마리안느가 서있다. 전신샷이다. 프레임이 가만히 멈춰있는 사이 엘로이즈가 화면 내로 걸어 들어온다. 1시간 22분 13초만에 영화의 첫 오버더숄더 샷이 등장하는 순간이다. 그러자 곧장 빛이 꺼지며 마리안느가 사라진다. 오버더숄더샷에서 대화가 이루어지면 안 된다는 듯이.


두 번째 장면(1:33:44)은 엘로이즈의 정면샷으로 시작된다. 주방에서 물을 마신 엘로이즈가 주방 문 밖으로 걸어 나온다. 촛불이 빠진 주방 안이 어두워진 순간 홀연히 빛과 함께 마리안느의 환영이 나타난다. 그러자 엘로이즈는 거의 곧장 뒤돌아보고, 이번에도 마리안느의 환영은 사라진다.


세 번째 장면을 본 뒤 다시 앞의 두 장면을 살펴보면, 진정한 문제는 환영이 나타났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마리안느가 이 환영을 눈치챘다는 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장면은 심지어 관객에게도 예고되지 않은 장면으로, 관객으로서는 엘로이즈가 왜 뒤를 돌아보았는지 미리 알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 두 번째 장면처럼 시각적 힌트가 주어진 것도, 세 번째 장면처럼 청각적 힌트가 주어진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엘로이즈는 이 아무런 힌트도 없는 환영을 어떻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일까? 정말로 ‘마력’이라도 느낀 것일까? 그런데, 이 장면에서 정작 마리안느는 정반대 방향에 있었다. 그곳엔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이것을 해석할 하나의 가설은 이 영화의 3분 2초부터 1:51:45까지를 일종의 ‘프루스트 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이 영화의 러닝타임 대부분이 마리안느의 회상이었다고 가정해보면 어떨까? 자신이 그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그림을 본 마리안느는 거기에 클로즈업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 안에서 기억을 더듬던 마리안느가 자신이 본 엘로이즈의 마지막 모습을 문득 마주치곤 한다. 말이야 되지만 지나친 가설인 것 같다.


또 하나의 가설은 마리안느가 느낀 것이 ‘침묵’이었다는 것이다. 오르페우스 신화에서 오르페우스가 결국 뒤를 돌아본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며, 판본마다 다르다. 어떤 버전에서는 그저 오르페우스가 약속을 깜박했다고 하고, 어떤 버전에서는 제우스가 내린 벼락소리에 놀라 돌아봤다고 하며, 에우리디케가 나를 향한 사랑이 식었냐고 물었기 때문이라고도 하며, 발소리만 들릴 뿐 대답은 하지 않아서 그랬다고도 하고, 반대로 대답은 하지만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내 짐작이지만 원래 이 신화엔 뒤를 돌아본 이유 따윈 없었을 것이다. 기독경에 실린 ‘소금기둥’ 일화처럼 그저 “뒤돌아보지 말라”는 금기에 관한 신화이기 때문이다. 신화의 비극은 본래 불합리한 법이다. 일단 여기서 그 이유를 ‘침묵’으로 가정해본다면, 이 영화의 사운드와 함께 얘기해볼 거리가 풍부해질 것 같다.


“소리는 항상 영상을 환기시키지만, 영상은 결코 소리를 환기시키지 못한다”고 로베르 브레송은 말했다. 이 영화에서도 사운드는 마들렌처럼 기억의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모닥불 장면을 마리안느가 기억해내고 그린 이유는 분명 그 장면에서 흘러나온 음악 때문일 것이다.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이 수행하는 역할도 이와 비슷하다. 피아노로 어설프게 쳤던 음악이지만 이것은 두 사람의 추억이며, 작중 내재음향으로나마 처음으로 나오는 음악이기도 하다. 결말에서 이 음악이 다시 교향악으로 (사실상 내재적 외재음향으로) 흘러나올 때, 엘로이즈의 클로즈업된 얼굴에서 드러나는 복잡다단한 표정은 기억의 홍수라는 말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음악이 기억의 촉매제라면 침묵은 망각의 촉매제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와 첫날밤을 보내러 가는 바로 그 순간부터 뒤를 돌아본다. 그때 그가 바라본 것은 침묵이다. 침묵이 거기에 있기에 돌아본 것이 아니라, 돌아봤기에 비로소 망각이 시작된 것이다. 이 장면이 유이하게 오버더숄더 샷으로 찍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버더숄더 샷은 시점의 동일시를 깨는 샷이다. “오즈 야스지로의 대화 장면에서 우리가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대화 장면에서 시선의 교환은 이중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지점이다. 듣는 이가 뒷모습으로 카메라의 바로 앞에 화편화되기에 우리는 일차적으로 듣는 이에게 동일시가 이루어지지만, 듣는 이의 완전한 시점쇼트가 아니기에 대화 장면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을 이차적으로 가지게 된다.”  마리안느가 환영을 바라볼 때, 그 뒤에서 마리안느를 바라보는 시선이 또 있다. 이 장면에서 유령 같은 존재는 엘로이즈의 환영만이 아니라 다름아닌 관객이기도 한 것이다. 이와 같은 분열의 순간을 거친 뒤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마리안느는 다시 엘로이즈를 어깨 뒤로 유체이탈한 상태로 바라보는 대신 자신의 시점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렇게 자신의 시점을 온전히 되찾는 것이 ‘과거’의 마지막 장면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로써 비로소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다시 바라볼 권리를 되찾은 것처럼, 마리안느는 현재의 시간 속에서 엘로이즈를 또 보게 된다. 영화에서 유일한 내레이션이 흘러나온다. “마지막으로 그를 봤다.” 과거시제로 말하고 있다. 미래의 시점이다.(*에필로그가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시점에서 바라본 마지막 플래시백이었을 수도) “그는 날 보지 못했다.” 비발디의 음악이 고막을 때린다.


마지막 장면이 비록 11분 가량 되는 ‘여름’을 온전히 담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긴 롱테이크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대략 3분). 영화에 나온 건 비발디의 여름 중 마지막 클라이맥스 부분인데 우리는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바라본 시간이 이보다 훨씬 길 거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이제 엘로이즈에게 과거의 시간이 다가온다. 엘로이즈는 ‘마리안느를 바라보고 있다.’ 아마도 여기서 또 다른 판본의 영화를 시작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몫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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