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탱고>(1980)
<탱고>의 시작. 공이 하나 방 안으로 굴러들어온다. 방 안에 누군가 없는지 확인한 소년이 조심스레 들어와 공을 갖고 나간다. 그러자 공이 다시 하나 방 안으로 굴러들어온다. 다시 소년이 나타난다. 타임루프다. 그런데 시공간의 꼬임은 이 소년 하나에게만 발생하는 것은 아닌 듯싶다. 아이를 재우려는 여성이 한 명 나타나고, 도둑이 나타나더니, 점점 더 사람이 불어나면서 각자가 자신만의 타임루프에 빠져 이 방에 연거푸 되돌아온다. 처음엔 서로를 비껴나도록 세심하게 설계됐던 동선도 점차 겹치기 시작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다.
탱고는 원래 두 사람이 추는 춤이다. 세어보니 애니메이션 <탱고>에서는 한 컷에 최대 30여명까지 등장하기도 한다. 이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 영화적으로 두 장면이 겹치게 해서 서서히 다른 장면으로 넘기는 기법을 오버랩이라고 한다. <탱고>는 마치 이 오버랩 기법에서 겹치게 해서, 까지만 있고 서서히 다른 장면으로 넘긴다, 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시치미를 뚝 떼고 중첩을 시킨다.
이처럼 텅 빈 방에서 중첩된 군중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일상적인 풍경이 떠오른다. 휴일 저녁, 대도시의 거리, 아주 큰 사차선, 횡단보도가 직선과 대각선으로 뻗어 있고 신호가 바뀌자 바글바글한 사람들이 용케도 서로 부딪히지 않고 길을 건너간다. <탱고>의 방 안은 말하자면 이러한 횡단보도 같은 곳이다. 인도도 아니고 차도도 아닌, 신호가 바뀔 때마다 그 용도가 바뀌는 애매한 공간. 누군가 청소를 하기도 하고 전구를 갈다가 쓰러지기도 하며, 아침을 먹는가 하면 그저 왼쪽 문에서 오른쪽 문으로 가기 위해 경유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처음엔 이 사람들 사이의 관계성이나 개개인의 에피소드를 상상하던 관객도 점차 집중력을 잃게 된다.
이러한 혼돈 속의 질서 안에서 개별 에피소드를 상상한다는 것이 무의미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 방의 정체에 대해 상상한다는 것도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접시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비명, 구둣발 소리가 어지럽게 교차하는 공간 그 자체에 대해 감독은 할 말이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그건 결국 교차하며, 부딪히는 대신 통과해버리는 이러한 다중성에 대한 것이 아니었을까? 작품에서 가장 튀는 장면을 찾아보자. 다름아닌 별안간 찾아오는 마지막 장면이다. 끝없이 불어나기만 할 것 같던 사람들이 하나씩 퇴장하며 마지막엔 처음 등장한 노인이 침대에 누운 채 홀로 남는다. 첫 장면에서 등장했던 소년이 공을 가지고 나가자 마자 소년은 사라지지만, 공은 재빠르게 튀어올라 방 안으로 돌아온다. 그렇다. 생각해보니 이 텅 빈 방에 처음으로 나타났던 움직이는 물체는 사람이 아닌 바로 이 농구공이었다. 죽은 듯이 누워있던 노인이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듯 멈춰있다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농구공을 집어들고 밖으로 나가며 마침내 방이 텅 비어버린다. 나가기 직전 노인이 보이는 제스처를 세심하게 살펴보자. 노인은 농구공을 든 채 방 안을 훑어본다. 이게 대체 어디서 나타난 물건인지 알아내려는 제스처일까? 훤히 열린 창문이 아닌 방 안을 훑어본다는 것에 주목해보면 그런 것 같진 않다. 아마도 노인은 귀신처럼 사라져버린,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방 안을 가득 메웠던 그 다중을 찾고 있는 것 같다. 노래가 멈춘다. 탱고가 끝났다. 노인이 나간다.
절묘하게 마주치지 않으며 끝없이 단절된, 게임 속 NPC처럼 주어진 스크립트만 반복하는 이러한 다중에게 있어, 같이 등장하지 않는 한 같은 공간 안에 있어도 다른 사람의 존재는 인지되지 않는다. 이는 문화학자 엄기호가 묘사한 “쉴 새 없이 접속하고 끊임없이 차단”하는 ‘사회 없는 사회’의 모습과 똑닮은 것이 아닌가? 기껏해야 가족, 연인 정도만이 간신히 인식될 뿐 무관계한 타인은 내 ‘곁’에 존재하지 않는다. 과잉접속 된 상태에서도 관계는 단절된 이런 아이러니한 상태를 두고 엄기호는 ‘단속사회’라 표현했다. 1981년 나온 애니메이션이 고도로 발달된 온라인 생태계가 삶의 한 축으로 자리잡은 2010년대 사회에 대한 분석서와 같은 통찰을 보여준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