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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이병현 Dec 18. 2022

잃어버린 동기를 찾아서

<여고괴담> 리뷰

품 속의 검은 칼

1990년대를 하나의 특징적 시대로 꼽는 기준은 다양하겠지만, 나는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를 하나의 기점으로 상상해보곤 한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된 이유는 엉뚱하게도 2001년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 때문이다. 아직 90년대의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200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갓 20대가 된 인천 출신 여자상업고등학교 졸업생들을 다룬 청춘영화를 보며 해외여행 자유화를 세대 분기점으로 상상하는 까닭은 물론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비행기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더해서 작중 제대로 된 직업을 갖지 못해 방황하던 주인공이 선원을 구한다는 공고를 보고 찾아 들어간 곳에서 남성들의 호모소셜에 튕겨져 나온 장면 때문이기도 하다. 한때 마도로스가 선망 받는 직업 1위였던 시절이 있으며, 60년대 대중가요 가사에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가 마도로스와 뱃사람이라는 단어라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이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여성은 (특히 한국에서) 남성과 달리 사회에 제대로 진출할 기회를 얻지 못하며, 해외로 나갈 기회도 얻지 못할 처지에 놓여있었는데, 이렇게 바다로의 진출이 막힌 상황에서 그나마 숨통을 트여준 것이 하늘이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처음으로 한국을 닫힌계가 아닌 열린계로 경험한 세대가 바로 90년대에 20대가 된 70년대생들, 이른바 X세대였다.

<고양이를 부탁해>의 주인공들은 그 자유롭고 풍요로운 해방기로서의 90년대를 20대가 아닌 10대로 보낸 세대다. 이들이 그 자유를 만끽하기 전, 97년 금융위기 사태가 벌어졌고 한국은 다시 반쯤 닫힌계로 쪼그라들고 말았다. 2001년에 스무살이었던 이들이 보냈을 과거에 대해 상상해보기 전에 먼저 이들이 보냈을 법한 미래에 대해 상상해보자. 이들이 영화 속에서 취업준비생으로서 그토록 갈망하던 소위 말하는 ‘제대로 된 직업’, 다시 말해서 사무직 일자리를 얻었다고 쳐보자. 정확히 3년 후에 나온 단편영화 <잘돼가? 무엇이든>에서 이경미 감독은 사회초년생이 된 여성들의 처지를 그린다. 성실하게 일해보려 하지만 믿음직하다는 이유로 주어지는 업무는 회사의 장부를 조작하는 일에 불과한 아이러니를 코믹한 터치로 그려내는 이 작품에서 여성들의 미래는 여전히 답답할 정도로 불투명하다. 자원이 한정된 닫힌계 안에서 여성연대는 비현실적인 단어로만 여겨지고, 일종의 파국을 통해서 성취될 수 있는 불안정한 것으로 그려진다. <잘돼가? 무엇이든>의 주인공은 꿈에서 세상 사람들과 속절없이 부딪히며 걷다가 칼에 베이는 자신을 발견하는데, 그가 자신을 친 행인에게 “왜 사람을 쳐요?”라고 항의하자 상대방은 주인공에게 “그러게 왜 속에 칼을 품고 다녀요?”라고 타박을 놓는다. 주인공의 얼굴에 떠오르는 억울하고 당황스런 표정, 스치기만 해도 상처를 입을 정도로 날카롭게 벼려진 칼, 이 칼을 주인공은 대체 언제부터 품고 다녔던 것일까?

다소의 도약을 허용한다면 이 칼을 매개체로 <여고괴담>으로 돌아가보고자 한다. <고양이를 부탁해>가 나오기 정확히 3년 전에 나온 이 영화에서 재이, 혹은 진주가 불끈 쥔 주먹 안에 쥐고 있던 조각칼에 대해 생각해보자. 아마도 <괜찮아? 무엇이든>의 주인공이 보냈을 과거, 그리고 <고양이를 부탁해>의 등장인물들이 보냈을 과거, 1998년 한 여자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일련의 살인 사건의 진범을 추적해보기 위해선 먼저 하나의 장면을 고려해야만 한다.


누구를 위하여 피는 흐르는가

<여고괴담> 1편을 보다가 움찔한 장면이 있다. 클라이맥스에서 (다소 의무방어전격의) 대화가 오간 뒤 귀신이 사라지는 장면 바로 다음에 따라붙는 장면이다. 귀신이 칠판 너머로 스며들 듯 사라지고, 음산한 종소리가 울리며 교실 벽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처음엔 스며 나오듯 한두줄기 흐르던 피가 이내 두텁게 쏟아진다. 곧 교실은 피칠갑을 한다. ‘나는 이 장면을 보고 왜 움찔했을까?’ 생각은 바로 다음 질문으로 향했다. ‘이 장면이 가리키는 대상은 무엇일까?’

교실의 표어와 이른바 ‘현모양처’의 상징인 신사임당의 그림을 뒤덮는 핏줄기를 떠올리며 첫번째 질문에 답해보자. 아마도 움찔하며 놀라는 감정은 교실로 표상되는, 터부시되는 무언가를 이 장면이 건드렸기 때문에 나온 반사반응이 아닐까 싶다. 교실로 표상되는 터부시되는 무언가? 어쩌면 대한민국에서 의무교육을 마친 나의 개인사를 떠올려보면, 교실 그 자체가 금기의 대상일지도 모른다. 어렴풋이 마음 한 구석에서 ‘저거 청소는 어떻게 하나’라는 생각을 떠올린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여고괴담>에서 일어난 일련의 억압적 사건들-성희롱과 성추행을 일삼는 남교사로 대표되는-과 그에 대한 반발심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관객석이라는 안전한 자리에서 거리감을 확보한 상태에서도, 여전히 교실 벽에 온통 피칠갑을 하는 것에 대한 심리적 저항감은 사라지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던 것이다. 이야말로 의무교육의 쾌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두번째 질문으로 향하면 이러한 사적 설명은 또 다른 해석을 통해 확장되어야 할 것 같다. 다시 해당 장면으로 돌아가보자. 먼저 귀신이 사라진다. 그러자 정체불명의 피가 교실을 뒤덮는다. 이윽고 누군지 모를 제3자, 다른 학생이 교실로 들어서 (이전의 패턴과는 달리) ‘엉망이 된 교실’이 아침까지도 그대로인 것을 확인한다. 학생이 다시 문을 닫고 복도를 걸어가는데, 뒤를 돌아보는 순간 이 학생이 새롭게 태어난 귀신이라는 것을 관객은 확인한다. 공포영화에 흔한, 후속작을 암시하는 뻔한 클리셰에 불과할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일단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메멘토 모리>(이하 <여고괴담 2>)는 이러한 암시와 아무런 상관도 연결고리도 없는 전혀 별개의 작품이다(사실 후속작이라는 표현이 정당한지도 잘 모르겠다). 그러니 이 장면이 후속작의 암시일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해당 장면을 오롯이 <여고괴담>이라는 작품을 완결 짓는, 마지막 장면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이 장면은 뒤가 없는 장면이다. 앞 장면들과의 연관성 속에서만 해당 장면은 온당하게 평가될 수 있다.

<여고괴담1>의 클라이맥스 시퀀스는 누구에게 향하는 장면인가? 이는 곧 교실에서 흐르는 피가 누구의 것인지 묻는 것과 진배없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이 피는 재이-진주 귀신의 피다. 귀신이 사라지자마자 피가 흘러나왔다는 점, 그리고 영화 내내 천장에서 흘러내린 핏방울이 다름아닌 JJ라는 글자 위에 떨어졌다는 점 등이 이 가설을 지지하는 증거다. 또 하나의 (다소 약한) 가설. 마지막 숏에서 귀신이 뒤를 돌아보는 순간, 귀신은 자살한 정숙의 얼굴을 하고 있되 성난 얼굴로 돌아보는 대신 웃음을 짓고 있다. 이때 앞선 장면이 지시하는 대상이 이 정숙 귀신이라는 주장은 충분히 제기될 만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일종의 변증법적 방법을 시도해보면 어떨까? 어쩌면 흘러나온 피는 둘 모두의 것이 아닐까? 나는 재이-진주 귀신과 정숙 귀신이 동일한 존재일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물론 둘의 얼굴이 다르다는 것은 모두가 본 자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재이와 진주가 이름은 다르되 같은 존재라는 것 역시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재이-진주 귀신과 정숙 귀신이 얼굴은 다르되 같은 존재가 아니라고 볼 이유가 있을까? 이름이 의미가 없다면 과연 얼굴은 의미가 있는 것일까? 지칭하는 대상과 지칭어가 분리되는 이런 현상을 유체이탈이라 부를 수는 없는 것일까? 육체로부터 분리된 영혼, 실제 사건으로부터 분리된 뜬소문, 그것이 응축된 괴담이라는 형식. 나는 지금 질문으로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여고괴담>이라는 영화 역시 정확히 이와 같은 재귀적 논리로 이루어져있다.

살인의 반복적 패턴을 떠올려보자. 일정 부분 추리극의 형식을 빌린 <여고괴담>에서는 세 번의 죽음이 나온다. 그런데 첫 번째 죽음과 세 번째 죽음 사이, 모든 관객이 은근하게 바라마지 않던 두 번째 죽음은 다른 두 죽음과는 완전히 다른 패턴을 하고 있다. 일단 살인의 과정이 자세하게 묘사된다. 이 과정에서 남교사는 모래지옥에 서서히 빠져드는 개미처럼 죽음의 장소인 교실로 향하는데, 이때 카메라는 마치 이 남교사의 고통을 관객의 쾌감의 원천인양 느긋하게 훑는다. 마치 슬래셔 무비에서 살인마에 쫓기는 ‘금발미녀’를 쫓는 카메라와 비슷한 목적의식이 느껴질 정도다. 무엇보다 시체 뒷처리 방식이 이 죽음을 다른 두 죽음과 완전히 구별시켜준다. 보란듯이 구름다리 아래에 전시되어 있던 두 시체와 달리, 남교사의 시체는 감쪽같이 사라진 뒤 미술실에서 발견된다. 실패한 네 번째 살인 시도 장면에서는 교실로의 유인은 나타나지만, 살인이 실패했기 때문에 당연히 매장, 혹은 은폐는 발생하지 못했고, 이 때문에 교실에 흐른 피가 아침까지 남아있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여고괴담>을 추리극으로서 성실히 독해하자면 여기에선 다소 곤란한 지점이 발생한다. 일단 정황상 자살임이 명확해 보이는 세 번째 죽음은 살인범, 즉 귀신과 완전히 무관한 것이라고 보자. 그렇다면 이 귀신은 영화상에서 두 사람을 죽인 것이다. 묘사상 첫번째 죽음 역시 자살이 아닌 타살이라는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첫번째 살인과 두번째 살인 사이엔 누가 봐도 뻔한 차이가 있다. 오히려 유사점을 찾자면 세번째 살인 시도와 두번째 살인 시도 사이에 더 강한 연관성이 느껴진다. 특정 교실을 최후 무대로 삼아 사냥감을 몰아넣는 방식이 그렇다. 그리고 여러가지 면에서, 박기숙 선생의 죽음과 정숙의 죽음 사이의 친연성이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겉으로 드러난 플롯과 대사는 모든 살인(과 살인미수)이 동일범의 것이고 정숙의 죽음은 전혀 다른 별개의 사건임을 주장하지만, 나는 영화를 곱씹어볼수록 범인이 두 명이 아니었느냐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즉 자살로 위장된 두 사람의 죽음을 일으킨 존재와 우리가 지켜본 재이-진주 귀신은 전혀 별개의 존재가 아닌가 하는 가설이다. 그런데 박기숙 선생은 귀신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고, 정숙은 자살한 것이라는 건 앞서 살펴봤듯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결과적으로 또 다른 범인은 정체불명이며 사건은 오리무중 상태에 빠지고 마는 것 같다. 초자연적인 물리적 힘으로 기숙을 죽이고 정숙의 심리를 자살로 이끌 수 있는 존재는 영화상에서 오직 재이-진주 귀신 외엔 제시된 적이 없다. 게다가 재이-진주 귀신에겐 박기숙 선생을 죽일 만한 뚜렷한 동기도 있다. 정숙의 자살은 일련의 살인 사건들과는 별개로 진행된 플롯을 통해 도달한 귀결점이라고 넘어가면 그만이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깔끔하게 끝나지 않는 암시와 단서들은 여전히 외면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살인과 시체 처리의 패턴이 달라지는 결정적 요인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우리는 마지막 장면에서 재이-진주 귀신 말고 또 하나의 초자연적 존재를 이미 보지 않았던가?

정숙 귀신이 얼굴을 보이는 장면은 오직 <여고괴담> 안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정숙 귀신이 얼굴을 보이는 것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이를 후속작 예고를 위한 뻔한 클리셰로서 기능하는 반전으로 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추리극의 속성상 예상할 수 있는 또 다른 반전을 예비해두어야 마땅하다. 즉, 이제껏 탐정이 좇고 관객이 예상해왔던 범인이, 알고 보니 진범이 아니었으며 또 다른 범인은 단죄되지 못했다는 반전이다. 정숙은 자살했으니 당연히 정숙을 죽인 사건의 진범은 정숙일 것이며, 박기숙 선생과도 다퉜다는 것은 작품 속 흘러가는 대사로 암시된 바가 있으니 박기숙 선생을 죽일 만한 동기도 있다고 봐야할 것이다.

교사를 죽이고 교실을 엉망진창으로 파괴하는 것은 학생의 터부임과 동시에 은밀한 소망이다. 학생이라면 누구나 무의식 속에 품었을 꿈, 정숙 귀신은 그 꿈을 구현하는 존재로서 기능한다. <여고괴담>의 재귀성은 결국 스크린을 벗어나 관객석으로 향하는지도 모른다. 개봉 당시의 흥행과 학생들 사이에 일었던 신드롬이야말로 이 영화를 완성하는 요소인 것이다. 귀신이 지시하는 것, 괴담이 지시하는 것, 실체 없는 뜬소문처럼 <여고괴담>은 결국 보는 이 자신을 투영하는 그릇이 된다. 진범은 곧 귀신과 눈을 마주친 카메라, 관객 그 자신이며, 피 흘리는 교실 장면은 마치 거울처럼 관객을 가리키고 있다.


죽는 학생들의 사회

<여고괴담>에 대한 내부 독해를 통해서 우리는 또 다른 범인이 정숙이자 귀신들로 대변되는 관객 자신이라는 점을 드러냈다. 그런데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지점은 있다. 재이-진주 귀신이 그토록 반복적으로 졸업앨범에 모습을 드러내고, 특정한 교실과 책상에 집착한 까닭이다. 이는 어쩌면 사건의 진범을 밝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작업이다. 나는 아무래도 이 괄호 쳐진 부분이 재이-진주 귀신이 남교사의 시체를 공공에 전시하는 대신 미술실 바닥에 매장한 원인이라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1997년 외환위기[1] 직후 개봉한 이 영화를 <고양이를 부탁해>나 <괜찮아? 무엇이든> 속 여성 캐릭터들의 과거사이자 2000년대에 제작된 영화들이 드러내는 사회상에 대한 일종의 전사로서 생각해보자면, 이 영화가 한국의 교육체계를 넘어서 한국 사회 그 자체, 혹은 그 안의 여성들에 대한 메타포로 기능한다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일제시대에 지어진 (이 글을 쓰는 현재 아예 철거된)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는 <여고괴담> 속 학교는 교복부터 시작해 이곳저곳이 시대착오적이다. 현재로부터 뚝 떼어내어 과거로 회귀시킨 듯한 이 배경부터가 어쩌면 90년대 후반, 급격하게 가능성의 문이 닫히고 닫힌계로 돌아가던 한국사회를 페티쉬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일지도 모른다. 돌파구도 없고 도피처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 감금된 상태로 귀신으로 대변되는 당대 관객들은 스승과 선배; 다시말해 앞 세대 전체를 죽이고픈 희망을 거리낌없이 드러내는 한편, 그 살인을 감추고 싶은 분열증적 감정과 함께 강렬한 자기파괴욕구를 드러낸다.

살인에 대한 강렬한 충동이 ‘늙은여우’의 죽음을 전시하는 행태로 드러난다면, 이에 대한 분열증적 반응으로 ‘미친개’의 죽음은 은폐되고, 어쩌면 이 모든 살인행각에 대한 반동으로 다시 자신의 죽음을 정확히 살인과 같은 방식으로 반복해 죄를 씻고, 공공에 전시한 뒤, 그러나 이 흔적을 다시 강렬하게 교실이란 공간에 피로 새겨 넣는 모든 과정은 널뛰기하듯 일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한편으론 뻔한 패턴을 그린다. 한국 영화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뻔뻔한 <여고괴담>의 서사는 <여고괴담2>에서는 교실을 넘어선 학교 전체로 확장돼 다시 선생을 죽이고 학생들을 혼란에 빠트리지만, 이후 이 이야기는 이를 테면 학교 문제를 다룬 수많은 영화들-<돼지의 왕>을 비롯한 많은 작품에서는 자살로, <죄 많은 소녀> 같은 작품에서는 자살미수 및 자해로, <말죽거리 잔혹사> 같은 영화에서는 1차원적 쌈박질로, <명왕성> 같은 작품에서는 사제폭탄 테러로-에서 우회적인 방식으로 그려진다. 얼핏 강렬해 보이지만 결정적으로 무언가를 얼버무리는 듯한 이 영화들의 결말이 벌이는 다양한 회피의 목적은 결국 나의 존재를 알아달라는 시위다. 이러한 속내를 회피하는 대신 솔직하게 드러낸 결정적 대사는 2018년에나 등장한다.

(번안된 기억에 대해 양해해주시기 바라며 인용하자면) “나는 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내가 죽는 거야. 내가 죽으면 날 때리던 아빠도, 그리고 엄마나 다른 사람들도 다 나한테 미안해하는 거야. 그들이 장례식장에서 우는 모습을 꼭 보고 싶어.”(지숙) “그런데 다들 우리한테 미안해하기는 할까?”(은희) 1994년 여름을 배경으로 한 영화 <벌새>에서 가정폭력 피해자인 두 친구가 서로에게 털어놓는 말이다. 나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피를 뿌리며 과잉된 이미지를 드러내는 <여고괴담>의 클라이맥스 장면이 하고 싶은 소리가 결국 이것이라고 본다. ‘이래도 미안하지 않아? 정말로 안 미안하다고?’ 말하자면 이 지점에서 귀신은 지켜보던 관객과 분리를 시도한다. 빙의가 풀리는 순간임과 동시에 관객이 피해자로부터 가해자로의 이행을 겪는 순간이다. 이 장면이 기억에 남으며 움찔하는 신체적 반응까지 일으키는 연유가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또한 이 한 섞인 외침은 유난히 (분신)자살이 억울함과 항의의 표현으로 자주 등장하는 한국사회에서는 그다지 낯설지 않은 감정이기도 하다.

<벌새>에서는 이 대사가 등장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내가 처음에 해외여행 자유화를 언급하며 얼버무리고 지나간 큰 사건이 두 개 등장한다. 김일성 사망과 성수대교 붕괴사건이다. 특히 성수대교 붕괴 사건에서는 영화 속 주요인물이 사망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속에 품은 칼, 은밀한 소망이 ‘원숭이 손 괴담’처럼 완전히 엉뚱한 방식으로 실현되는 일은 영화 속 세계에서는 종종 벌어지는 일이다. <고양이를 부탁해>에서는 집이 무너졌고, <괜찮아? 무슨 일이든>에서는 회사가 불탔다면, <벌새>에서는 성수대교가 무너지고 누군가 죽은 것이다. 성수대교 사건 이전에 지존파 사건이 있었고, 이후에는 삼풍백화점 사건이 있었으며, 마치 이 모든 일을 수습하려는 듯이 한국 최후의 사형집행을 통해 지존파를 죽여버렸다는 것은 2014년 개봉한 독특한 다큐멘터리 <논픽션 다이어리>가 잘 지적한 바 있다. 이처럼 원인과 결과가 제대로 된 인과관계를 맺지 못하는 현상은 일종의 징후에 가깝다. 나는 한국인들이 사회적 재난과 마주칠 때마다 어쩌면 “그러게 누가 속에 칼을 품고 다니래?”라는 생생한 환청을 듣는 것이 아닐까 생각할 때가 많다. 바로 그런 두려움이 품에서 칼을 꺼내 누군가를 겨누기 보다 그 칼로 스스로를 찌르는 방식을 택하게 만드는 이유가 아닐까 추측한다. 나는 (여)학생들이 이러한 양자택일의 처지에 놓인다면 차라리 칼을 꺼내 들어 휘두르길 촉구하며, <여고괴담>의 극단적 이야기에 대한 옹호에는 일정 부분 이런 마음도 담겨있다.


피 흘리는 자와 살아남은 자

하지만 칼을 꺼내드느냐 마느냐 하는 양자택일의 처지는 무협영화가 아니라면 그다지 설득력 있는 구도는 아니다. 게다가 칼을 꺼내든 자들이 꼭 정확히 적을 겨누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엉뚱한 방향으로 휘두르곤 한다는 것은 굳이 지존파 사건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답답한 처지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앞서 언급한 영화들을 통해 발견한 바 있다. 이들이 제시하는 해법은 ‘(여성)연대’라는 다소 고지식한 개념으로 귀결된다. 그런데 프로이트가 말했듯, (칼로 대체되는) 죽음 충동은 결코 (연대로 대체되는) 삶충동으로 사라지게 만들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그러니 재이-진주 귀신이 그토록 친구를 갈구하던 이유가 무엇일지 떠올려보면, 이 결말을 단순히 ‘연대’를 구하며 그의 (앞세대를 향한) 명백한 살인동기를 (같은 세대) 동기와의 우정으로 교환하는 깔끔한 결말로 생각한다면 이는 단순한 도착증에 불과하게 된다. 귀신을 보는 관객 모두가 신드롬(증후군)에 빠져드는 것이다. 그보다 이것을 일종의 반복강박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 재난이 휩쓸고 지나간 공백지대에서만 일시적이고 위태롭게 성립되는 것이 연대라면, 그것은 폐허를 바라보는 관음증적 시선에 불과할 것이다. 연대를 강조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영화는 필사적으로 소멸시키고 싶은 죽음충동을 자꾸만 귀환하게 만들고 있다. 피 흘리는 자로서 귀신은 예수처럼 모든 이의 죄를 대속하며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피를 만방에 내보이며 끝내 돌아오고 만다. 이 기이한 반복. 여기서 진정으로 가져야할 의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반복을 왜 기이한 것, 귀신으로 치부하는가? 왜 이 반복은 ‘시대착오’적으로, 과거로 또 미래로 갈래로 뻗으며 우리에게 다가오는가? 반복의 조건이 바뀌지 않는 한 반복이 사라질 일은 없다. 같은 조건 아래에서 강박은 다시 무럭무럭 자라난다. 우리가 이 여성괴물의 귀환을 기이한 것으로 여긴다면, 이는 역사를 진보적 발전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환상’ 탓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 끊임없이 반복되는 재난이 벼락처럼 상기시켜주듯이, 이는 어디까지나 환상에 불과하다.

역사를, 그리고 당대를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 글에서 나는 <여고괴담>의 마지막 장면을 후속작을 예고하는 클리셰가 아닌 해피엔딩을 거부하는 비관습적 태도로 재독해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하나의 제안을 더해보자. 다시 마지막 장면으로. 피로 덮인 교실 안에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는 두 사람은 간밤의 소란이 지난 뒤에도 그 상태 그대로 조각상처럼 머물러있다. 정숙 귀신이 이 모습을 확인하고 뒤를 돌아본다는 점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 밤을 지새우고 누군가 문을 열어도 반응하지 않는 두 사람의 상태에 대해서는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 같다. 이들이 빠져있는 철저한 수동성, 무기력한 마비 상태는 들뢰즈가 {시네마2}에서 표현한 ‘보는 자’의 상태와 겹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이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 충격의 근원은 무엇일까? 그것은 귀신이나 귀신이 저지른 살인 사건이 아니라, 학교 자체가 귀신을 끝없이 소환하는 장소라는 근본적인 자각이다. 즉 재난이 트라우마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재난을 만들어낸 한국사회 자체가 트라우마로 작동한다. 이 고통스러운 자각의 현장은 보이는 그대로 피범벅 된 잔인한 장소이며, 1998년 한국의 좌표이기도 하다.

결말이 해피엔딩이 아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여고괴담>을 운동-이미지가 아닌 시간-이미지로 분류한다면 이는 지나친 과장일 것이다. 때문에 어디까지나 <여고괴담>이 전통적 장르영화이자 대중영화라는 관점에서, 나는 영화가 마지막에 시도하는 것이 전통적인 샷-리버스샷이라고 가정해보고 싶다. 정숙이 정면을 바라보는 샷은 그에 반응하는 샷 없이 끝난다는 의미에서 실패한 샷이다. 그러나 상상선을 영화 내부가 아닌 화면 바깥 스크린에 긋는다면, 우리의 반응이야말로 반응샷일 것이다. <여고괴담>은 반응을 요구하는 영화다.

             

[1] 외환위기와 여성귀신 공포영화 붐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 손희정. (2005). 한국의 근대성과 모성재현의 문제. 한국영화학회 학술발표대회 논문집, (),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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