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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이병현 Dec 18. 2022

박제가 되어버린 공무원

나루세 미키오의 <부운> 리뷰

일본에서 아직까지도 ‘패전’이라는 키워드가 유효한 인문학적 용어로 쓰인다는 것은 가끔 신기할 때가 있다. 물론 한국에서도 '해방정국'이나 '한국전쟁' 등이 비슷한 역할을 맡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래도 일본의 '전후론'과는 그 양상이 다른 감이 있다. 그 차이를 낳은 원인에 대해 가끔 생각해보곤 하는데, 제국과 식민지였다는 차이도 있겠지만 무언가 단절된 감각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도 있는 것 같다. 『사쿠라 진다』라는 책에서 우치다 다쓰루와 시라이 사토시는 본질적으로 일본은 ‘패전을 제대로 받아들인 적이 없고, 드러내 말하진 못했지만 내심 미국과의 전쟁을 (경제적인 방식으로나마) 계속 이어나갔다’고 서술하는데, 이것은 일본인들의 공통감각을 잘 설명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본토에서의 결사항전을 각오했고, 이를 진심으로 외치던 일본인들이 별안간 닥친 항복에 얼떨떨하던 상황, 그것이 바로 패전 직후의 일본이었다.


어른이 되어라?

영화 초반, 두 사람이 달라트의 숲에서 산책하다가 입맞춤을 하며 현재의 시간대로 넘어오는 장면이 흥미롭다.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 장면에서 존 포드의 <모감보>가 떠올랐다. 마침 개봉일에 2년의 격차밖에 없으므로 어쩌면 느슨한 연관고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이 장면을 비교해보자.


그림1(태그 갤러거의 『존 포드』 415쪽)
그림2(나루세 미키오의 부운)


물론 이를 두고 오마쥬라고 표현하기엔 두 장면 사이 마초적인 배우 클라크 게이블과 마초적인 것과는 영 거리가 먼 배우 모리 마사유키의 인상만큼이나 다른 점이 있다. 이를테면 구도. 처음부터 끝까지 포식자 남성이 피식자 여성을 쫓아가 사냥하는 구도의 <모감보>와는 달리 <부운>은 여성이 남성의 뒤를 조용히 따라간다. 다만 한 가지 의심스런 힌트가 있다면 유키코가 들고 있는 스카프(손수건?)일 것이다. 태그 갤러거는 <모감보>의 위 장면을 묘사하며 다음과 같이 쓴다. “그가 린다의 스카프를 벗겨내 버릴 때, 린다는 머리가 한 마리의 새처럼 비스듬해지고 정서적으로는 거의 벌거벗은 상태가 된다. 이는 황홀한 사랑과 죽음의 숏이다. …(새처럼 생긴 목과 스카프라는 형상은 <기병대>에서 동일하게 반복된다.)” 마찬가지로 유키코는 키스 직전 거의 같은 구도로 목을 들고 있다가, 현재로의 급격한 컷 이후 고개를 ‘한 마리 새처럼’ 비스듬하게 숙인다. 그런데 유키코는 스카프를 손에 쥔 채 만지작거리고만 있었으니, 사실 처음부터 거의 정서적으로 무방비한 상태였던 것이다. 대체 둘 사이에 어떤 끌림이 있었는지 당최 짐작할 수가 없는 수준이라 둘 사이의 나이차(배우만 따졌을 때 13살 차이다)를 고려하면 거의 불쾌하기까지 한 키스 장면이 영화상으로 정당화되는 것은 기실 이러한 이미지를 통한 암시가 아니고서야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런데 이 장면이 무엇을 암시하는 것일까? 전자가 황홀한 사랑과 죽음의 숏이라면 후자에 어려 있는 정서는 보다 암울한 쪽에 가까운 것 같다. <부운>의 커플이 사랑보다는 죽음에 가깝다는 것은 이미 두 사람이 여러 차례 내뱉는 ‘동반자살’(이 또한 굉장히 일본적인 정서지만)에 대한 열망으로도 암시된다. 어찌됐건 영화는 이미 이 시점에서 유키코의 죽음을 점지해뒀다고 봐야할 것이다.


도미오카는 마치 자기자신에게 다짐하는 것처럼 유키코에게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수차례 내뱉는다. 달라트에서의 생활은 과거에 불과하다, 우리의 로맨스는 종전과 함께 끝났다, 이제는 본국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이는 형용모순에 가까운 언사로, 도미오카는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고는 굉장히 불성실한 태도로 삶을 영위해 나간다. 말로는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지만 명함도 새로 파지 않은 채 이런저런 여자나 꼬시면서 나 몰라라 인생을 대강 내키는 대로 살고 있는 걸 보면, 실은 위에서 되풀이하는 말은 핑계에 불과하고 그 내심은 중간에 딱 한 번 말하는 “차라리 달라트에 머물러 거기서 둘이 살 걸 그랬어”에 가까울 것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도미오카의 뻔뻔한 멘탈리티가 나로서는 굉장히 특기할 만한 지점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를테면 ‘매춘’하는 여성에게 빌붙어 살며 기껏하는 행동이라고는 자기파괴적인 것밖에 없는 것이 꼭 한국 남작가들의 문학작품 속에서 드러나는 식민지 남성성에 가깝다고 본다. 정희진이 「반미문학을 통해 본 식민지 남성성의 형성」이라는 논문에서 주장하는 개념 ‘식민지 남성성’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시기가 미 군정기임을 고려해보면, 작중 유키코가 ‘양공주’로 그려지는 것도 이유가 무엇인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내가 우습게 생각하는 것은 한편으로 도미오카는 여전히 ‘달라트 시절’, 즉 자신이 미군정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인이 아니라 동남아를 지배하던 제국민이던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가 더욱 우스꽝스러워지는 지점은 자살자살 하고 외치며 돌아다니던 도미오카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유키코가 병에 걸려 죽는 결말이다. 도미오카는 최소한 세 여성을 죽음에 이르게 한 뒤 공무원의 삶으로 돌아가는데, 이것이야말로 졸지에 식민지 남성으로 ‘전락’한 일본 남성들 본인의 심리상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장면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인들에게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런 의미를 지니는 것이며, 때문에 아직까지도 ‘패전후론’이 끝없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영화를 보며 절실히 깨달았다.


산책하는 침략자

영화상에서 가장 급격한 전개로 느껴지는 부분은 산책, 사이비종교, 임신중절로 이어지는 일련의 시퀀스이다. 산책하는 커플이 낙태에 대해 고민한다는 내용은 한국영화에서도 이만희 감독의 <휴일>이 다룬 바가 있으니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난감해지는 부분은 사이비종교다. 위에서 도미오카가 말하는 ‘로맨스’(제국 일본)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말한 것 같은데, 주인공인 유키코에게 ‘로맨스’란 도미오카와는 또 다른 의미를 갖고 있는 것 같다. 자신을 성폭행한 사촌에게 찾아가 낙태비용을 빌리고 종교에 몸을 의탁하는 유키코 역시 도미오카와 마찬가지로 일본인들의 또 다른 전후 공통감각을 표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단 유키코가 놓인 처지를 생각해보자. 영화를 보면서 관객으로서 계속해서 떠올린 의문은 대체 유키코와 도미오카가 왜 공무원을 그만뒀는지 알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도미오카야 사업을 한다는 입에 발린 명분이라도 있었지만, 유키코는 그저 관청에서 일하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는 언급 말고는 별다른 이유도 없다. 이쯤해서 나는 일본인들에게 공무원이라는 것이 갖는 이미지가 구로자와 아키라의 <이키루>에서 묘사된 것(쁘띠-카프카적인)에 가까운 것인가 하는 의문도 갖게 된다. 어떤 의미로 도미오카와 유키코는 둘 다 제국주의 시절의 ‘관료주의’에 대한 죄책감을 품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죄책감이 좋은 방향으로 승화되는 <이키루>와 달리 끝까지 해소되지 않고 내부로 침잠하는 <부운>의 태도는 확실히 구질구질하기는 해도 어떤 의미에선 정직하다. 유키코에게 이 죄책감은 어디서 연원한 것이며 어디로 향한 것인가? 자신이 죽음에 이르도록 한 남자를 사랑하는 유키코의 자기파괴적 태도는 내게 스톡홀름 증후군에 가까운 것으로 보였다. 유키코에게 도미오카를 향한 집착의 기원은 달라트의 숲, 다시 말해서 패전하기 전의 제국 일본이라는 ‘호시절’에 있기보다는 친척집에서 사촌에게 당한 수년 간의 성폭행에 있는 것 같다. 짧은 플래시백으로 제시되는 사촌의 성폭행 장면은 유키코가 달라트의 숲 속에서 도미오카와 ‘로맨스’에 빠지기 직전 가노 씨에 대해 묘사하며 “어젯밤 아주 취해서 제 방에 오셨어요. 무서워요.”라고 말하는 그 장면을 되풀이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렇듯 여성에게 상존하는 강간에 대한 위협을 두고 수잔 브라운밀러는 “모든 남성이 모든 여성을 공포에 사로잡힌 상태에 묶어두려고 의식적으로 협박하는 과정이 바로 강간”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여기서 다시 한번 <모감보>의 위 장면(그림1)에 대한 태그 갤러거의 경악스러운 한 묘사를 인용해보자. “구조된 린다는 마치 겁탈당하길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감정적으로 발가벗은 채 서 있다가 뽐내듯이 걸어가는데 스카프는 흔들리고 빅은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다.” 다시 내가 앞서 <모감보>와 비교했던 <부운>의 해당 장면을 보자.


그림3
그림4


그림3에서 유키코는 (태그 갤러거의 묘사를 따르자면) 도미오카의 눈에는 마치 겁탈당하길 원하는, 감정적으로 발가벗은 상태처럼 보였을 것이다. 이를 남성적 시선에서 고쳐 서술하자면, 유키코는 마치 보호받길 원하는, 아이처럼 무방비한 상태처럼 보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곧장 이어지는 장면이 그림4다. 그림3에서 그림4로 이어지는 이 장면의 편집은 굉장히 튀어보인다. 이를 그림1에서의 <모감보>의 편집과 비교해보면 <부운>의 편집이 부자연스럽다는 사실이 더욱 잘 드러날 것이다. 왜 <부운>은 이 지점에서 마치 멈칫거리는 것처럼 남자가 여자를 쫓는 장면을 연출하는 대신 여자가 남자의 도움을 받아 남자의 뒤를 쫓는 장면을 연출한 것일까? 남자가 총을 들고 있지 않기 때문일까? 즉, 이 남성은 <모감보>에서의 남성과는 달리 사실상 거세된 상태라는 정신분석학적 암시인 것일까? 나는 그런 해석보다는 이 부자연스럽게 튀는 편집이 주인공인 유키코의 입장에서는 보다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해석이 맞다고 생각한다. 사촌에게 수년 간 그루밍 성범죄를 당한 유키코의 심리상태를 고려해보면, 간밤에 또 다시 남성을 향한 트라우마가 자극되어 공포에 질린 상태에서 유키코는 도미오카를 다른 남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줄 또 다른 남성으로 선택한 것일 수 있다. 즉 가해자를 보호자로 여기는 스톡홀름 증후군 환자의 부조리하고 모순된 심리가 무의식 중에 이러한 가시적 편집으로 암시된 것이다. 처음에 이러한 산책은 ‘로맨스의 환상’ 속에서 키스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다소 갑작스러운 현재로의 점프컷(밝은 숲에서 작고 어두운 방으로의 컷)이 암시하듯이 종전을 기점으로 그 로맨스의 환상도 끝을 고한다. 이제 영화 중반부에 한 번 더 반복되는 이 둘의 산책이 처음과는 달리 초라한 무좀과 사이비종교로 이어지는 기제가 밝혀진 듯하다. 두 번째 산책의 끝에서 유키코는 키스를 하는 대신 자신을 처음 강간한 사촌과 재회한다. 산산이 부서진 로맨스의 잔해 속에서 공포의 기원을 직시한 유키코는 이윽고 신문지상을 통해 자신의 미래를 겹쳐보듯이 도미오카의 또 다른 연인 오세이의 죽음을 확인한다. 유키코는 이때야 비로소 자신이 제국주의 식민지의 관료가 아니라 남성지배 체제의 피식민지인이었음을 깨달은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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