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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이병현 Aug 09. 2024

X에게

윤아랑 평론가에게 답함

[기획] "새로운 비평의 지평을 열다", 제 29회 <씨네21> 영화평론상 심사평 - 우수상 문주화, 이병현 

씨네21에 올해 영화평론상 수상 작품과 심사평, 저를 포함한 당선자 인터뷰가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1.

친구가 X(옛 트위터)에 올라온 게시물 하나를 캡처해 보내주었습니다.
확인해보니, 윤아랑 평론가가 저를 향해 비난을 가하며 작은 소란이 일어나고 있더군요.

오해가 있으신 것 같아 몇 가지는 꼭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첫째로, 저는 가명이나 필명을 사용해 응모한 적이 없습니다. 씨네21에서 제 경력을 숨기고 당선된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블로그에도 이미 쓴 이야기지만, 씨네21 측에서는 저의 경력 때문에 저를 탈락시킬지 고민했다고 말했습니다.

둘째로, 제가 붙은 박인환상과 씨네21 영화평론상 공모는 공식적으로 경력 제한이 없는 공모전입니다. 만약 경력 때문에 제가 떨어졌다면, ‘원칙대로’ 따져봤을 때 불공정한 대우를 받은 쪽은 저일 것입니다.
(물론, 설령 경력을 이유로 탈락했다고 해도 전 ‘도의적으로’ 그 사실을 수용했을 것이고, 영화평론 업계와 무관한 친구와 함께 하는 술자리라면 몰라도 공개적인 자리에서 불만을 제기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셋째로, 씨네21을 통해 ‘재등단’을 시도하거나 성공한 사례는 제가 처음도 아니며, 마지막도 아닐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는 씨네21을 통해 재등단을 시도하는 작가들을 뻔뻔하고 도리도 없다고 비난한 뒤 흘려보낼 일이 아니라, 어쩌면 다 함께 새로운 시스템을 고민해야 할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누군지 모를, 잠시 같은 공간에서 공부한 인연까지 나서서 인신공격성 욕을 퍼부어대니 감정이 좋지 않았지만 묻고 넘어가려 했습니다.
하지만 감정을 추스르고 보니 이게 비단 저 개인에 대한 공격만으로 치부될 문제인가 싶었습니다.
하여 입상 기사가 홈페이지에 올라온 이날, 무거울 수 있는 글을 올립니다.


2.
지금의 영화평론 등단 시스템과 이 업계엔 확실히 문제가 있습니다.
몇몇 잡지와 웹진 등을 제외하면 영화평론 고정 지면이 없는 상황에서 매년 약 8명 이상의 신인 평론가가 새롭게 나오고 있죠.

매년 정기적으로 신인을 뽑는 곳은 씨네21, 부산 영화의전당, 부산영화평론가협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한국독립영화협회, 동아일보, 부산일보, 박인환상, 쿨투라 등이 있습니다.
그 외에 필로에서도 상시 원고 투고를 받고 있고, 간헐적으로 시민의 비평상, 문화/과학 문화비평 공모전, SeMA-하나평론상,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 연구소 문화평론상, 예술세계 신인상, 인간과문학 신인작품상 등이 영화평론가 혹은 영화평론과 느슨하게 관계를 맺는 인재를 배출합니다.
각종 문화원 원고와 일회성 이벤트(FM 청년 영화평론가상, 대한민국예술원 영상예술 평론 공모 등)까지 포함하면 등단 영화평론가의 숫자는 생각보다 빠르게 늘고 있습니다.

그들 모두가 글쓰기를 이어 나가진 못합니다.
대부분은 쥐도 새도 모르게 그 흔한 영화 리뷰 블로그조차 운영하지 않고 영화평론을 접습니다.

단순히 영화 평론의 지면이 부족해서 생긴 문제인가?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인이 마땅한 기회를 얻지 못하고 절필하는 이런 상황은 영화평론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니까요. 영화평론보다 수요도 지면도 많은 예술 장르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중고신인’, ‘개점휴업’이라는 단어가 제가 만든 신조어가 아닌 이유입니다.

등단한 신인들이 사라지는 데엔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제일 큰 이유는 우리들이 ‘지면’의 호출을 받는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글로 먹고 살기 위해서는 ‘지면’을 얻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첫 작품부터 화려하게 눈도장을 찍지 못한 대다수의 신인들은 존재감을 발휘하지 못하고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생계를 위해 잠시 펜을 놓았다가 그 사이에 잊혀지는 경우도 부지기수죠.
타의로든 자의로든 절필을 하게 되는 겁니다.


등단은 했지만 작가로서 활동은 하고 있지 못한 애매한 상태에 놓인 사람들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절필을 하거나, 다시 한 번 공모전에 도전하거나.

물론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있겠지요.
돈도 받지 않은 채 꾸준히 글을 써서 블로그에 올리거나 출판사에 투고한다거나,
유튜브를 비롯한 커뮤니티를 통해 존재감을 표출하거나, 맘이 맞는 사람들과 스스로 지면을 만드는 등…….
하지만 저를 비롯해 많은 작가들이 ‘재등단’이라는 선택을 합니다.

왜 그럴까요?
‘재등단’이 가장 자본이 덜 들며, 가장 가능성이 높고, 가장 보상이 확실한 선택이니까요.
저의 경우로 한정하자면 실질적으로 재등단이 아니고서는 작가로서 먹고 살 길을 찾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박인환상 수상 후 가진 인터뷰에서 밝힌 것이지만, 저는 신진예술인 활동증명도 만료된 상태였습니다.

예술인 활동증명이 요구되는 사업 등에도 지원할 수 없는 상태였고, 박인환상 수상을 통해 다시 예술인 활동 증명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수상 상금을 제외하고 제가 5년 반 동안 영화평론가로 지내며 평론으로 번 돈이 얼마인지까지 여기서 밝히고 싶진 않습니다.

제가 5년 반 동안 활동하며 공식 지면에 발표한 제대로 된 긴 영화평론이 단 한 편 뿐이었다는 말로 갈음하겠습니다.


예술활동증명이든 원고료든 그게 평론가로서의 제 정체성과 활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건 아니지만, 살아 숨쉬는 한 개인으로서 활동의 지속성에 의문을 품게 만드는 수준이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객관적으로 돌아보아도 제가 특별히 ‘파렴치한’ 선택을 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평론에만 한정지어도 재등단 선례들이 많습니다. 시나 소설, 드라마 극본까지 고려하면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고요.


결국 재등단이라는 건 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궁여지책으로서 성립하고 있는 것이고,

‘등단 창구’ (메이저 문예지, 중앙지 등) 역시 이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지원자격에 제한을 두지 않는 공모전’들은 단순히 신인 발굴에만 목적을 두지 않습니다.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사라졌던 중고신인이 다시 한 번 재조명될 수 있는 기회의 장도 겸합니다.


물론 재등단이라는 건 진정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저 역시 그걸 모르지 않고요.


애초에 왜 등단이라는 과정이 필요하냐고, 그리고 절필과 재등단 말고 다른 선택지를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제게 그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면 저 역시 그 문제의식에 충분히 공감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다시 제 얘기로 한정지어 말하자면, 한 개인으로서 대학을 떠나 취직을 하고 직장인으로 살아가며 영화평론을 쉽게 접지 않을 거라고 수없이 되뇌면서도, 그게 언제나 제 다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펜을 꺾는 대신 재등단을 택했습니다.


혼자 글을 썼고 공모전에 그걸 냈습니다.

어느 공모전엔 언급도 없이 떨어졌고, 어느 공모전엔 최종심에 올랐고, 어느 공모전에서는 당선됐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작년과 올해 2년 연속 당선됐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은 하고 싶지 않지만,

취직을 하고 이직을 하고 재취업을 하는 와중에는 혼자서 글을 쓰는 일조차 제겐 버거웠습니다.

이런 버거운 현실에 처한 사람은 한국 문단에서도 영화평론계에서도 제가 처음이 아니었으며, 앞으로도 마지막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가장 쉬운 길’을 택한 제 개인의 선택은 반성하되,

앞서 재등단을 선택한 선배들과,

훗날 재등단을 선택할 동료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 괴로움을 누구보다 잘 아니까요.


3.

글을 마무리하기에 앞서 이 글을 쓴 목적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윤아랑 평론가께서 사과를 해주신다면 아름다운 마무리가 되겠지요.

하지만 저 개인에 대한 사과보다도, 시스템에 대한 윤아랑 님의 의견과 성찰을 담은 글이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해주신다면 이 사태의 시발점이 된 윤아랑님의 글이 단순히 이병현이란 개인에 대한 저격에 그치지 않고, 시스템에 대한 논의의 장을 연 글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윤아랑 님뿐만 아니라 이 글을 읽은 모두와 함께 이 버거운 현실을 이겨낼 해결책을 고민하고 싶습니다.

따로 또 같이, 무엇보다 느슨하고 건강하게 연대하며.


당연하지만 ‘영화(평론)의 위기’라는 담론은 ‘영화평론가의 먹고사니즘 문제’에 한정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구차한 글을 쓰면서도 우린 그걸 잊어서는 안 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모두 열심히 쓰시길.

저도 열심히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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