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올바른 방향만을 향할 순 없으니
문득 다가온 가을의 찬바람을 느끼며 그런 생각이 스쳤다.
보잘것없는 나라도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올바른 방향으로 계속해서 나아갔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리저리 헤매긴 했어도 쓰러지지 않고 계속해서 발을 내디뎠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 처음부터 원대한 목표, 커다란 꿈을 설정하는 행위는 오히려 지나친 피로감을 불러올 수 있다. 어린 날의 나는 지나치게 큰 꿈과 닥치지도 않은 문제들에 허덕이며 당장에 해야 할 일들을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었다. 까짓 거 조금 헤매도 되는데.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인해 험난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시골 촌놈으로 태어났지만 부족할 것 없이 유년 생활을 보내왔던 나에게 아버지의 사업 실패는 인생 전반을 흔들어 놓는 일생일대의 사건이었다. 그 사건 덕분에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줄곧 '전학생'의 이름표를 달고 다녔다. 경상도에서 나고 자랐던 나는, 전라남도 목포를 거쳐 경기도 남양주, 그리고 시흥으로 전학을 다녀야 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가 숱한 전학의 원인이었다는 것은 내가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그전까지는 그저 전학이라는 약간 특수한 형태를 반복할 뿐이지 다들 그런 식으로 고만고만하게 살아가는 줄 알았으니까. 아직도 목포 단칸방 벽 한 면 전체를 뒤엎은 곰팡이와, 장마철에 비가 오면 천장 곳곳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받아내기 위해 바닥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물통들과 현관문 바깥에 별도로 떨어져 있던 푸세식 화장실은 좀처럼 잊을 수 없다. 그것은 '가난'의 모습이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일찍 철이 든 탓인지, 학업에 있어서는 꽤 열의가 있었다. 가난이라는 콤플렉스는 내가 남들보다 무언가 뛰어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는 하나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던 모양이다. 중학교 2학년까지는 전교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하기도 했다. 그러다 3학년이 되어서 나의 첫 방황이 시작되었다. 그 또래 아이들이 그렇듯 공부가 너무나 하기 싫어졌고, 앞으로의 인생은 그려볼수록 전반적으로 답답한 느낌만 안겨주었다. 당시 음악과 독서, 글쓰기가 있었기에 크게 비뚤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학업에 대한 열정은 좀처럼 다시 타오르지 않았다. 당시 어른들은 마치 약장수라도 된 듯 공부만 열심히 하면 인생 만사가 풀린다는 듯이 떠들어댔다. 그런 모습들에 오히려 인생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것일 리 없다고 스스로 생각했지만, 좀처럼 다른 돌파구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어느새 고등학교를 졸업해야 할 때가 되었고, 나는 대학을 가는 대신 '직업군인'이라는 길을 택했다. 그 직업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고, 큰 뜻도 없었다. 남들 대학 가서 졸업장 따는 동안, 일단은 군 복무 문제도 해결하고, 4년 동안 월급 받으면서 돈도 좀 모으자는 그럴듯한 외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사실 별 생각이 없었다.
"될 대로 되라지"
혹독한 환경에서 버티거나 견디는 것이 이미 어릴 적부터 체화되었기에 녹록지 않은 군생활이었음에도 견뎌낼 수는 있었다. 어린 나이에 부사관으로 들어가, 부대 배치를 받고 보니 상병장들의 나이가 나와는 3~4살, 많게는 5살 이상 차이가 났다. 살면서 3살 이상의 성인 남성에게 반말을 해본 경험이 없던 나로서는 상당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만, 시스템은 나를 가둬놓은 만큼 많은 것들을 가능하게 했다. 어린 나이에 겪었던 사회생활은 정말이지 쉽지가 않았다. 역시, 세상은 학교 선생님들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만만치 않았다.
전역 이후에는 여행을 다녔다. '고삐 풀린 망아지'라는 표현이 찰떡이 될 만큼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자전거로 전국을 누비고 다녔고, 일본살이에 대한 동경으로 워킹홀리데이도 다녀왔다. 세상은 참 넓었다. 그러는 가운데 중심을 잡지 않으면 쉽게 흔들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에서 중심이 되어줄 만한 것, 우리나라 사회에서 남들이 보장해 줄 만한 것이라. 나는 자연스럽게 학위를 떠올렸다. 학업에 대한 갈망이 미친 듯이 샘솟았고 곧바로 수험생활에 돌입해 수능에 응시했다. 꽤 나쁘지 않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배움을 위해 간 대학이었지만, 당시 대학교는 나의 기대를 처참히 짓밟았다. 집에서는 먼 거리에 떨어져 있던 터라 자취를 해야 했는데, 월세와 더불어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주 4일 이상은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었다. 학업과 병행을 하니 그야말로 살인적인 스케줄이 되었다. 이렇다 할 큰 배움도 없었던 터라, 나는 1년간의 학교 생활을 마무리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직업을 가져야 하나 싶어서 공무원 시험을 3달간 준비했지만, 첫 시험을 보고는 손을 놔버렸다. 도저히 흥미가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형이 결혼 소식을 알려왔다. 내가 내년에 삼촌이 될 것이라는 소식과 함께 말이다. 나에게 다시 직업을 가져야 할 이유가 생겼다. 조카에게만큼은 멋진 삼촌이 되고 싶었으니까. 마침, 형이 경찰 공무원을 하고 있었다. 왠지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운이 좋게도 1년이 채 되기 전에 경찰 공무원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3년이라는 시간 뒤에 아무래도 경찰 역시 나에게는 맞지 않는 옷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퇴직을 결심했다. 그렇게 나는 지금 아무런 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로 이렇게 글을 쓰는 중이다.
30년이라는 세월이 짧다면 짧을 수 있지만, 참으로 길고도 머나먼 여정이었음을 내 인생을 이렇게 조목조목 짚어보면 느낄 수가 있다. 내 인생이 누군가에게는 위태롭게 보일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멋져 보일지도 모르겠다.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래서 결국 백수라는 거 아니냐'는 다소 냉소적인 태도로 받아들여질지도 모르겠다. 사실, 어떻게 바라보든 내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같다.
이토록 휘몰아치고, 헤매고, 부딪힌다 할지라도, 쓰러지지만 않는다면 다음에 가야 할 길을 내다볼 수가 있다. 가끔은 주저앉고, 때로는 다시 일어나기 힘들 정도의 상처를 받을 때도 있지만, 꿋꿋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보면 언젠가 나아가야 할 길이 보란 듯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 인생이다. 누구든 운이 좋아서 한 번에 올바른 방향을 발견하고 확신을 가지면서 꿋꿋이 나아갈 수는 없다. 애초에 그런 인생은 아무런 배움도 가르침도 없기 때문에 운이 좋다고 말하는 것도 이상하긴 하지만 말이다.
통제할 수 없는 것 투성이인 세상에서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방황은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 등을 알아가는 여정은 그 자체로 인생 속을 헤매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인생에서 헤매고 있다는 사실에 좌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 역시도 숱하게 헤매왔고, 지금도 헤매는 중이지만 결코 좌절은 하지 않는다. 이 여정을 즐기는 것 또한, 태어난 우리의 숙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헤매도 괜찮다. 다만, 쓰러지지만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