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봉필 Oct 06. 2024

양날의 검

인생에 항상 좋기만 한 것은 없다


나름의 공략을 찾은 듯했지만, 아이들과의 생활에는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으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아이들과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나 사이의 간극은 소백산맥만큼이나 높고 험준했다. 어차피 나는 굴러온 돌, 그들과 나란히 할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것은 나였다. 나 스스로를 온전히 드러낼 것인가, 아니면 어설프게라도 그들을 따라 할 것인가. 외눈박이 나라에 간 두눈박이가 자신의 한쪽 눈을 도려내는 정도의 희생은 아닐지라도 안대로 가리는 것 정도의 노력은 해야 그 나라에서 먹고 살아갈 수 있는 법.


고심 끝에 나는 표준말을 구사하기로 마음먹었다. 경상도 사투리는 그들 사이에서 너무나 튈 수밖에 없기에 놀림감이 되기 쉽고, 갓 전라도로 전학 온 내가 그들의 말씨를 따라 한다 해도 어딘지 모를 어색함이 묻어 나올 것이 뻔하다. 그 어색함을 더 놀리고 싶어 하지 않을까? 결국, 나는 그 어느 쪽도 아닌 제3의 선택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사투리가 아닌 표준말을 구사하기로. 최인훈 작가의 <광장>에 등장한 주인공만큼의 비참한 심정의 각오라기보다는 나름의 비장한 결단이었다. 다행히 아이들의 반응은 크게 나쁘지 않았다. 때때로 튀어나오는 경상도 사투리에 잠깐의 놀림은 있었지만, 신경 쓸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언어의 장벽도 괜찮게 허물었고 나름 학급에서 성실하고 공부 잘하는 이미지를 쌓은 덕분에, 학급 안에서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처음 전학을 왔던 4학년 때와는 천지 차이였다. 학급의 모든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었고, 나름 가깝게 지내는 친구들을 두셋 정도 두었다. 나중에 어머니를 통해 전해 들은 이야기이지만, 때때로 나를 좋아하는 여학생이 우리 집 앞까지 쫓아오기도 했었단다. 나 모르게 쫓아왔다는 사실은 좀 소름이긴 하다. 녹록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나름의 노력으로 꽤 평범한 학교 생활을 해낼 수 있었다. 어머니는 돈가스 식당에서 주방과 홀을 오가며 일을 했고, 아버지는 공사판을 전전하며 일용직 일을 했다. 아직까지 젊은 두 분이었기에 묵묵히 최선을 다해 우리 두 형제를 위해주었다. 상황적으로는 많이 힘든 것이 맞았지만, 한편으로는 함안에서 지낼 때보다 훨씬 더 큰 행복감을 느꼈던 시절.


함안에 있을 때 아버지는 사업 실패로 인해 크게 좌절하여 술을 자주 마셨다. 눈앞의 근심과 걱정을 받아들이고 나아가기보다는 현실을 잊고 싶었던 모양이다. 갓 성인이 되었을 때에는 그랬던 아버지의 모습들이 나약하게만 생각됐지만, 역시 나이를 좀 더 먹고 보니 그 나이대에 모든 것을 쏟아부은 사업이 엎어지는 상황 자체가 여간해서는 이겨내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나날들로 인해 우리 네 식구가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은 함안에서 지내는 동안은 찾아볼 수 없는 그림이었다. 


모두가 힘겨운 일을 겪고 다시 일어서기 위해 들어선 목포에서는 달랐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 모두 고된 노동을 떠안게 되었지만, 가정에는 더더욱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마도, 자신들의 어려움으로 인해 우리들이 비뚤어질까 염려했던 것이겠지. 두 분은 힘든 상황 속에서도 더 끈끈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우리 두 형제는 이전의 생활보다 만족해하며 더없이 행복할 수 있었다. 역경과 고난 속에서 피어난 꽃은 더없이 아름다운 법이니까.


여름방학까지 행복한 모습을 그려나갔지만, 2학기부터는 마냥 그러지 못했다. 좋다고만 생각했던 모범생 이미지는 나에게 되려 족쇄를 채운 셈이 되었으니까. 공부를 잘하는 이미지를 놓고 싶지 않아서 더욱이 선생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려 들었고, 그런 모습들이 아마도 아이들은 아니꼬웠던 모양이다. 2학기가 시작하고 아이들은 선생님에 대한 반감을 서서히 드러내며 가끔 크고 작은 사고를 치기도 했다. 여느 아이들이 그렇듯이, 적응했다 싶으면 어지럽히기 마련이다. 선생님에 대한 반감은 고스란히 나에게도 돌아왔다. 2학기가 되어 학급 임원이라는 자리에 앉게 된 나는 학습부장이라는 직책을 맡았다.


"떠든 사람"


수업시간을 알리는 종이 친 뒤에 선생님이 업무가 있어 늦을 때면, 나는 교탁 앞으로 나가 아이들에게 책을 펼치도록 한 뒤 조용히 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이게 문장 그대로만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 같지만, 실상은 미움받을 용기를 내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당연히 우리 모두가 한 학급의 친구들일뿐인데, 나는 완장을 찬 뒤 그들보다 우위에 있음을 보이는, 소위 말하는 완장질을 자처했던 것이다. 선생님이 오기 전에 떠들거나 반발을 표출하는 아이들의 이름은 그대로 칠판에 새겨주었다. 이름을 적힌 아이들은 나에게 더 큰 반발을 표하기 마련이었다. 때때로 멱살을 잡히기도 했던 기억도 난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에, 완장의 무게는 너무 무거웠다.


어느샌가 학급 임원들과 임원이 아닌 아이들 사이에 커다란 벽이 생겼다. '재수 없다'라는 말을 밥먹듯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나는 굴하지 않았다. 어린 생각으로, 선생님을 따르는 것이 곧 정의라는 착각에 빠져있었으니까. 1학기 때에 그런 믿음으로 학교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다는 충분한 근거가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이따금 싸움에 휘말릴 뻔한 사태들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양날의 검을 쥐고 놓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감당해야 할 학급 임원의 무게라고 생각했었으니까.


균형을 맞춘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선생님의 예쁨을 받으려 하면 할수록, 아이들과는 더없이 멀어져야 했다. 수업 시간 분위기를 좋게 만들어야 한다는 명분을 지켜 선생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에게 강압적인 완장질을 해야만 했으니까. 반대로 아이들과의 화합을 도모한다면 수업 분위기를 해치게 되어 선생님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것이다. 그 사이의 중용, 그것은 어린 내가 받아들이고 실천하기에는 버거운 것이었다. 


그런 고민들이 난무하던 2학기 중에 나는 인생 두 번째 전학길에 오르게 된다. 또다시 낯선 환경에 던져진다는 불안감이 들기보다는 좀처럼 균형을 잡지 못했던 학교 생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계속 목포에 남았으면 나는 균형을 잘 잡을 수 있었을까? 아니면, 결국 강압적인 태도로 인해 아이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을까? 아마도 선생님을 저버리고 아이들과 어울리는 길은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더 큰 아픔이 시작되기 전에 잘 피해 간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전 04화 세상을 헤쳐나갈 무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