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된 전학은 나의 적응 능력을 한층 높은 단계로 끌어올렸다
확신에 찼지만 결국 휘청거리기만 했었던 목포에서의 학교 생활을 뒤로하고, 우리 가족은 경기도 남양주로 올라왔다. 경상도에서 전라도, 그리고 경기도. 이러다 전국일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다행히도 경기도가 마지막이었다. 남양주에서 시흥으로 한번 더 전학을 가긴 했지만, 큰 단위(도)의 행정구역을 넘나드는 만큼의 임팩트는 없었다. 결과적으로 숱한 전학의 나날들은 나를 한층 더 강하게 만들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나는 어린 나이에 낯선 환경에서 적응하는 법을 꽤 괜찮은 수준으로 몸에 익힐 수 있었다.
확실히 목포로 처음 전학을 갔을 때보다는 한층 더 수월하게 학교 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다. 공부나 숙제를 착실히 해나가면 선생님의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으니, 그런 것들을 우선 과제로 삼으면 된다. 그렇게 구축한 모범생의 이미지로 아이들과는 차근차근 가까워지되, 너무 재수 없지 않게끔 다가가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지난날의 과오를 통해 수정된 전략을 부지런히 적용해 나갔다. 다행히 목포에서 구사했었던 표준말 덕분에 경기도 아이들과의 언어적 장벽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5학년 2학기 기말고사를 보기 직전에 전학을 간 것이라 나름 정신없는 상황들 속에서 시험을 치러야 했지만, 나쁘지 않게 봤던 것으로 기억한다. 목포에서 수업 시간만큼은 착실히 집중했던 덕분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선생님도 괜찮은 분이었다. 아주 짧은 기간 시간을 보낸 탓에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지는 않지만, 전학 온 나를 따뜻하게 대해주었다는 어렴풋한 느낌은 있다. 다행히 모든 선생님들이 전학생을 나쁘게 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짝꿍씨"
그렇게 무탈하게 6학년을 맞이했다. 첫자리 배정부터 꽤나 발랄했던 여자아이의 옆에 앉게 되어 본의 아니게 학기 초부터 학급의 이목을 집중받는 일이 잦았다. 그 여자 아이는 나를 '짝꿍씨'라 불렀다. 아직까지도 신선하고 생소한 그 호칭을 부르며 해맑게 웃던 그 아이의 얼굴이 생각난다. 좋아하거나 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강렬할 수밖에 없었던 그 느낌에 매료되어 나의 당시 학교 생활이 보다 밝아졌을 뿐. 그 아이는 전교 회장이 되었고, 나는 목포에서의 기억 때문에 꺼려했던 학급 임원의 자리를 떠맡게 되었다. 순전히 그 아이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신은 전교 회장을 나갈 생각이니 학급 임원은 생각이 없다면서 그 아이는 뜬금없이 옆자리에 있던 나를 추천했다.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남들이 떠밀면 또 기대에 부응하고 싶어지는 이상한 성격을 지닌 나는 단칼에 거절하지 못하고 그대로 학급 부회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 덕분에 학기 초부터 많은 아이들과 스스럼없이 친해질 수 있었지. 회장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회장을 보필하는 부회장의 직책이었기 때문에, 큰 부담이나 책임도 없었다. 나에게 짝꿍씨라는 이름을 붙여준 그 아이에게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학급 내에서 임원을 맡게 되면서, 전교 학생회에서 자연스럽게 자리를 하나 또 맡게 되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생활부장'이라는 직책이었는데, 직책만 존재할 뿐 별다르게 할 일은 없다는 꾐에 자원했던 것이었는데, 사실은 하는 일이 떡하니 존재했었다. 그 일이라는 것이 한 달에 한번 있는 전교생이 모이는 운동장 조회 시간에 학교 생활을 하면서 지켜야 하는 수칙을 읊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별 일이 아니긴 하지만, 당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목소리를 낸다는 것 자체가 낯설었던 때라 조회시간은 늘 나에게 극한의 공포를 가져다주는 시간이었다. 조회시간이면, 그 두려움은 내 목소리에 고스란히 담기어 마이크를 통해 운동장 전반에, 전교생에게 울려 퍼지곤 했다.
당시 사촌 동생도 같은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형이 중학교를 간 사실은 나로서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동생도 역시 나의 그 떨리는 발표를 지속적으로 듣고 있었단다. 훗날 알려주기를 내가 나와서 덜덜 떨면서 발표를 할 때면, 자신의 담임 선생님을 비롯해 주변 선생님들이 웃음을 터뜨렸었다고. 흡사 염소를 연상케 하는 목소리가 꽤나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어린 나는 진지한 상태로 두려움에 떨고 있었을 터인데, 어른들은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단다. 어른이란 참으로 잔인한 종족이 아닐 수 없다.
그런 흑역사에도 불구하고 초등학교 6학년 생활은 여전히 나에게 행복한 추억으로 간직될 만큼 재밌는 시절이었다. 나를 포함해 다섯 명의 절친했던 학급 친구들은 늘 뭉쳐 다니며 온갖 재미난 놀이들을 동네 이곳저곳에서 함께 했고, 제집인 듯 친구들의 집들을 돌아가며 들락거리는 생활을 지속했다. 우정, 자유, 행복 그런 긍정적인 단어들로 꾸며진 것이 나의 6학년 생활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천진난만했던 만큼 철없이, 그리고 원 없이 정말 잘 놀았다. 내 기억상 인생에 몇 안 되는 '또래 아이들의 나이에 맞게 살아간'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딱 그때일 것이다. 그런 시절들은 언제나 너무 빨리, 그리고 예기치 못하게 막을 내리곤 한다.
나는 졸업식이 끝난 뒤에 절친했던 친구들에게 인사 한마디도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곧장 이사를 가야 했다. 왜 그랬는지 지금까지도 모르겠지만, 이사를 간다는 사실을 친구들에게 미리 알리지 않았다. 그래서 훗날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났던 친구들이 진지하게 그 부분에 대해 물어왔지만, 나 역시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 어린 마음에 이야기를 꺼내면 그것이 곧장 현실로 다가올까 두려웠던 걸까. 아니면, 친구들과 작별인사를 나누는 장면 속에 서 있고 싶지 않았던 걸까. 아무튼, 6학년을 졸업한 나는 가까웠던 친구들을 뒤로하고 어머니의 손을 잡고 다음 동네로 이삿길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