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날의 검

인생은 언제나 일장일단(一長一短)

by 봉필


나름의 공략을 찾은 듯했지만, 여전히 아이들과의 생활에서는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기본적으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아이들과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나 사이의 간극은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소백산맥만큼이나 높고 험준했다. 어차피 나는 굴러온 돌, 그들과 나란히 할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것은 순전히 나의 몫이었다. 나 스스로를 온전히 드러낼 것인가, 아니면 어설프게라도 그들을 따라 할 것인가. 외눈박이 나라에 간 두눈박이라면, 자신의 한쪽 눈을 도려내는 정도의 희생은 아닐지라도 안대로 가리는 것 정도의 노력은 해야 그 나라에서 먹고 살아갈 수 있는 법.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고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고심 끝에 나는 표준말을 구사하기로 마음먹었다. 경상도 사투리는 그들 사이에서 너무나 튈 수밖에 없었기에 놀림감이 되기 쉽고, 갓 전라도로 전학 온 내가 그들의 말씨를 따라 한다 해도 어딘지 모를 어색함이 묻어 나올 것이 뻔하다.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다가는 가랑이가 찢어지는 법이라고도 우리 조상님들은 말했었지. 그 어색함이 놀림의 타깃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결국 나는 그 어느 쪽도 아닌 제3의 선택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두 지방의 사투리가 아닌 표준말을 구사하기로. 최인훈 작가의 <광장>에 등장한 주인공만큼의 비참한 심정 속에서 다짐한 각오라기보다는 나름의 비장한 결단이었다. 다행히 아이들의 반응은 크게 나쁘지 않았다. 때때로 튀어나오는 경상도 사투리에 잠깐의 놀림 정도는 있었지만, 신경 쓸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언어의 장벽도 괜찮게 허물고 나름 학급에서 성실하고 공부 잘하는 이미지를 쌓은 덕분에, 학급 안에서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처음 전학을 갔었던 4학년 때와는 천지 차이였다. 학급의 모든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었고, 나름 가깝게 지내는 친구들을 두셋 정도 두었다. 나중에 어머니를 통해 전해 들은 이야기이지만, 때때로 나를 좋아하는 여학생이 우리 집 앞까지 쫓아오기도 했었단다. 나 모르게 쫓아왔다는 사실은 좀 소름이긴 한데? 혹시 그 아이는 봤을지 모르겠다. 대문 너머 오른편에 초라하게 주저앉아 있던 창고와도 같은 우리 집을. 당시, 대문에서 똑바로 바라보면 나오는 저택은 주인집이었고, 우리 집은 그 옆에 쓰러져가는 월세방이었는데 말이지. 이래저래 녹록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나름의 노력으로 꽤 평범한 학교 생활을 해낼 수 있었다. 어머니는 돈가스 식당에서 주방과 홀을 오가며 일을 했고, 아버지는 공사판을 전전하며 일용직 일을 해나갔다. 아직까지 젊었던 두 분이었기에 묵묵히 최선을 다해 우리 두 형제를 위해주었던 셈이다. 경제적으로는 많이 힘든 때였지만, 한편으로는 함안에서 지낼 때보다 훨씬 더 큰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우리 가족이 함안에 머물렀을 당시, 아버지는 사업 실패로 인해 크게 좌절하여 술을 자주 마셨었다. 눈앞의 근심과 걱정을 받아들이고 나아가기보다는 막막한 현실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모양이다. 갓 성인이 되었을 때에는 술독에 빠져들었던 아버지의 과거 모습이 마냥 나약하다고만 생각했었지만, 역시 나이를 좀 더 먹어 보니 그 나이대에 모든 것을 쏟아부은 사업이 엎어지는 상황 자체만으로 여간해서는 이겨내기 어려웠을 만한 상황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처자식을 거느린 네 식구의 가장이었으니, 그 무게는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내가 헤아리기에는 한참이나 역부족이겠지. 아무튼, 허구한 날 술만 마셨던(어머니는 자주 이런 표현을 한다) 아버지와 그럼에도 가계를 유지하고자 슈퍼 일을 도맡아 했던 어머니, 아무것도 모르고 해맑게 뛰노는 우리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있기는 했지만, 어쩐지 각자 다른 삶을 살아가는 듯했던 함안에서의 나날들이었다. 따로국밥이었다고나 할까.


힘겨운 일들을 헤치며 뚫고 나와 다시 일어서기 위해 들어섰던 목포에서는 달랐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 모두 이전보다 훨씬 더 고된 노동을 떠안게 되었지만, 가정에는 더더욱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마도, 당신들의 어려움으로 인해 우리들이 비뚤어질까 염려했었던 것이겠지. 두 분은 힘든 상황 속에서도 더 끈끈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우리 두 형제는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부모님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전의 생활보다 만족하며 더없이 행복한 가정 속에서 자라날 수 있었다. 역경과 고난 속에서 피어난 꽃이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고 하지 않는가. 마침내 우리 가족은 고난 속에서 제대로 된 가정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집안에서도, 학교에서도 여름방학까지의 행복이 계속해서 이어지길 바랐지만, 2학기부터는 그러지 못했다. 좋다고만 생각했던 모범생 이미지는 나에게 되려 하나의 족쇄가 되어 나를 괴롭혔더랬다. 공부를 잘하는 이미지를 놓고 싶지 않아서 더욱이 선생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선생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려 들었고, 그런 모습들이 아마도 아이들은 아니꼬왔던 모양이다. 2학기가 시작하고 아이들은 선생님에 대한 반감을 서서히 드러내며 가끔씩 크고 작은 사고를 쳐댔다. 작은 소란부터 해서 치고받고 싸우는 일들이나 학교 기물을 파손하는 일들이 일어나기도 했다. 여느 어린아이들이 그렇듯이, 적응했다 싶으면 어지럽히기 마련이다. 자신만의 교육 철학으로 학급을 이끌어가고자 했던 선생님을 지나치게 강압적이라 여겼던 아이들의 반감은 고스란히 나에게도 돌아왔다. 왜냐, 2학기가 되어 학급 임원으로서 내가 학습부장이라는 직책을 맡았으니 말이다.


"떠든 사람"


수업시간을 알리는 종이 친 뒤에 선생님이 업무가 있어 늦을 때면, 나는 교탁 앞으로 나가 아이들에게 책을 펼치도록 한 뒤 조용한 분위기를 유지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이게 문장 그대로만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 같지만, 실상은 미움받을 용기를 내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당연하게도 우리 모두가 한 학급의 또래 친구들일뿐인데, 나는 어쩔 수 없이 선생님이 하사한 임무를 완수해 내야 했기에, 조금이라도 수업 전 분위기를 흐리려는 아이들에게 어느 정도의 통제를 가해야만 했다. 속된 말로 완장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선생님이 오기 전에 떠들거나 반발을 표출하는 아이들의 이름을 그대로 칠판에 새겨주었다. 이름을 적힌 아이들은 나에게 더 큰 반발을 표하기 일쑤였다. 때때로 어떤 아이에게는 멱살을 잡히기도 했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에, 완장의 무게는 너무나 무거운 것이었다.


어느샌가 학급 임원들과 임원이 아닌 아이들 사이에 커다랗고 두꺼운 벽이 세워지는 듯도 했다. '재수 없다'라는 말을 밥먹듯이 들었던 시절이다. 그럼에도 나는 굴하지 않았다. 어린 생각으로, 선생님을 따르는 것이 곧 정의라는 착각에 빠져있었으니까. 1학기 때에 그런 믿음으로 학교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다는 충분한 근거가 나름대로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이따금 싸움에 휘말릴 뻔한 사태들이 몇 차례 있었지만,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양날의 검을 쥔 채로 놓지 않았다. 어느 한 방향으로 강력하게 휘두르지 않은 탓에 큰 사건 사고가 없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당시의 나는 그것이 내가 감당해야 할 학급 임원의 무게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는 한 편, 어느 한쪽으로 지나치게 크게 휘두르면 오히려 내가 화를 입을 것이라는 사실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겠지.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떤 일이든 균형을 맞춘다는 행위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선생님의 예쁨을 받으려 하면 할수록, 아이들과는 더없이 멀어져야 했다. 수업 시간 분위기를 좋게 만들어야 한다는 명분을 지켜 선생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에게 강압적인 완장질을 해야만 했으니까. 반대로 아이들과의 화합을 도모한다면 수업 분위기를 해치게 되어 선생님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것이다. 그 사이의 중용(中庸), 그것은 어린 내가 받아들이고 실천하기에는 상당히 버거운 철학이었다.


그런 고민들이 난무하던 2학기 중에 나는 인생 두 번째 전학길에 오르게 된다. 또다시 낯선 환경에 던져진다는 불안감이 들기보다는 좀처럼 균형을 잡지 못했던 학교 생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안도감이 먼저 들었던 기억이 난다. 계속 목포에 남았더라면 나는 균형을 잘 잡을 수 있었을까? 아니면, 결국 강압적인 태도로 인해 아이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을까? 아마도 선생님을 저버리고 아이들과 어울리는 길은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진심으로 당시의 담임 선생님을 좋아하고, 잘 따르고 있었으니까. 아마도 나는 다음 학년에 올라가는 시기쯤 따돌림을 심하게 당했지 싶다. 어쩌면 더 큰 아픔이 시작되기 전에 '전학'이라는 꽤 괜찮은 기회로 잘 피해 갈 수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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