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대한 이야기
나의 전학 여정은 경기도 시흥이라는 도시를 끝으로 마무리된다. 시흥 안에서도 총 세 번의 이사를 거듭하긴 했지만, 동네를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도시가 내 학창 시절의 마지막 도시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집'이라는 공간이 꽤나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어린 시절 나의 공간이 되어주었던 집들에 대해 종합적으로 이야기해 보는 것 역시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당시에는 집 자체에 대해서 그리 깊은 생각을 하지는 않았으나, 지나고 보니 나름대로 기억의 조각들을 뒤집어 살펴보면 집이 주었던 무의식적인 영향이 없지는 않았던 듯하다. 그 영향이랄 게 컸는지 작았는지를 떠나서 말이다.
내가 나고 자란 경상남도 함안의 작은 동네에서 우리 집은 두 채였다. 아버지가 운영했던 대리점 한편에 딸린 작은 공간을 포함해서, 조금 떨어진 곳에 지어진 신축 아파트에 우리 집이라는 한 공간이 더 있었으니 말이다. 아버지 사업이 나름 번창했던 시기여서 짧지만 강렬하게 풍족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남부러울 것 없이 뛰놀았던 그곳 검암리에서 집이라는 공간은 놀이터이자, 뛰놀다 지칠 때면 마음껏 쉬어갈 수 있는 쉼터였다. 그러다 IMF로 인해 아버지의 사업이 주저앉기 시작하면서 우리 네 식구는 슈퍼 마켓을 운영하게 되었고 그 슈퍼에 딸린 15평 정도 되는 집에서 생활을 했다. 당연히 신축 아파트나, 대리점은 우리의 공간이 아니게 되었지. 이전과 비교하면 명확히 줄어들어버린 공간이었지만, 여전히 어린 나이에 부족함을 느낄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나와 형이 공간을 채우기엔 아직 조그맣기도 했고, 우리들만의 공간도 나름대로 확보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 집에 머무를 당시, 때때로 화장실 하수구 구멍을 통해 생쥐들이 들어와 화장실 비누에 당당히 자신들의 영역 표시라도 하듯 앞니 자국을 남겨놓곤 했었다. 어머니는 그런 비누를 보며 읊조리듯, 쥐들이 이갈이를 하는 것이라는 설명을 어린 우리들에게 들려주었지. 때로는 선을 넘어 슈퍼마켓을 가득 채운 식료품들을 탐내던 생쥐들을 응징하기 위해 어머니는 끈끈이 쥐덫을 슈퍼 곳곳에 설치해 두셨고, 그 쥐덫은 언제나 훌륭하게 자신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었다. 쥐덫에 온몸이 달라붙어 꿈틀대던 쥐들의 모습은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하다. 그 시절에 이따금 커다란 생쥐가 쫓아오는 꿈을 꾸곤 했었는데, 어린 마음에 꽤나 강렬한 자극이었던 듯하다. 그 시절을 떠올릴 때면 쥐덫에 옴짝달싹 못하며 꿈틀대던 생쥐들의 모습도 어쩔 수 없이 머릿속에 재생되곤 한다. 군대에 머물던 때에 보급 창고에서 생쥐들을 보아도 태연하게 빗자루를 휘두를 수 있을 만큼의 담력을 장착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 생생한 경험들을 새겨왔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나날들이 이어지다가, 어느 날 우리 가족은 함안에서 야반도주를 감행하여 목포로 터전을 옮겼다. 사업 실패 이후 떠 앉게 된 빚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 아버지가 내린 결정이었다. 여기에 대해서 나 역시 많은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당사자가 아닌 이상 깊이 헤아릴 방도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선택을 옹호할 생각도, 비난할 생각도 없다. 다만, 아버지를 믿고 자본을 맡긴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 어떤 변명의 여지도 없이 잘못한 것이었다고밖에 말할 수가 없다. 아무튼, 그대로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은 도저히 미래가 없다는 판단을, 아버지는 내린 모양이었다.
아무런 계획 없이 최초로 들어섰던 목포 어느 동네의 단칸방에서는 일주일도 되지 않아 나올 수밖에 없었더랬다. 입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억수 같이 퍼부었던 날이 있었는데, 천장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탓인지 방 한쪽 벽이 그대로 축축하게 젖어버리는 광경을 온 가족이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옮겨간 집(?)에서 우리 가족은 정착하여 1년 동안 생활했다. 앞서 설명했듯이 집이라기보다는 주저앉기 직전의 창고에 가깝기는 했지만.
그 집(어쨌든 집이었으니까)의 전반적인 구조를 설명하자면 대략 이러했다. 대문까지 딸린 2층짜리 단독 주택(집주인의 집)이 있는 공간에서 창고로 쓰던 별채 같은 방을 개조한 것이었는데, 입구부터 문을 열면 샤워와 세면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나오고 그 공간 뒤로 부엌 정도의 3평 남짓한 방이 있고, 그 안쪽으로 잠을 잘 수 있는 조금 더 넓은 공간이 이어져 있었다. 투 룸(?)이라고 봐야 하나. 경악할 만한 사실은 화장실이 집 밖에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와서 오른편에 창고를 개조한 우리 집이 있었고, 왼편에 시멘트로 대충 세워놓은 공중화장실과 같은 한 칸의 푸세식 화장실이 있었다. 아직도 새벽에 용변을 보기 위해 여정을 떠나면서 느꼈던 스산한 추위가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어떻게 살아낼 수 있었는지 감조차 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갑작스레 깊은 우울과 같은 감정에 빠질 수 없었던 어린 나이였기에 살아가는 것이 가능했었는지도 모른다.
애초에 낯선 전학지였기 때문에, 깊이 친해진 친구도 없어서 집으로 데려와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시절이었지만, 아마 있었더라도 감히 데려오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 어느 집보다 집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했었으니 말이다. 당시에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해서, 부모님을 원망하거나 하는 사태까지는 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 나의 짧은 생각들에 오히려 감사한 마음도 든다.
두 번째로 전학을 갔던 남양주에서는 그나마 집다운 집에서 살 수 있었다. 여전히 작은 빌라이기는 했지만, 현관문을 열면 부엌과 함께 쓰는 거실 공간이 나오고, 그 중심으로 형과 내가 같이 쓰는 방, 그리고 화장실, 안방 이렇게 세 공간이 시계방향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삼촌네 가족이 당시 남양주에 살았기 때문에 그 부엌인지 거실인지 모를 공간에서 신문지를 깔아놓고 부루스타(휴대용 가스레인지)를 올려놓고 삼겹살을 구워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근처에 천마산이라는 산이 있어, 주말이나 휴일 등산을 마치고 저녁에 도란도란 두 식구가 모여 식사를 함께 하곤 했었다. 남아있는 추억들 가운데 꽤 괜찮은 추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뒤에 옮겨간 시흥에서도 나름 괜찮은 공간들에서 살아갈 수 있었다. 이름만 '아파트'였던 공간, 그리고 부모님이 잠시 식당을 차리게 되어 그 근처에서 머물렀던 빌라, 그리고 아버지의 사업 실패 이래 처음으로 가족들 모두가 힘을 모아 장만할 수 있었던 지금의 아파트에 오기까지, 참으로 험난한 여정이었다.
"그때부터 집은 그런 곳이었다. 누군가 푹 찌르면 울기보단 악을 쓰는 내가 마침내 울어지는 곳."
김미리 작가의 <아무튼, 집>의 짧은 구절을 우연히 접하고,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몇 구절을 통해 김미리 작가가 집이라는 공간에 대해서 상당히 좋지 못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나의 어릴 적과 마찬가지로 화장실이 없는 집에서 살았다는 점, 자신의 방이 없는 집에서 살았다는 점에서 나 역시 그녀와 같은 방식으로 공간에 대한 기억을 안 좋은 쪽으로 지닌 채 살아갔을 수도 있다. 내가 김미리 작가와 같은 방식으로 집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은, 순전히 그 당시에 깊은 감상을 남길 만큼 철이 들지 않아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그만큼의 예민함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거나. 되짚어 보면 그런 공간들에서 나나 형은 얼마든지 비뚤어질 수 있었다. 공간으로부터 비롯된 부정적인 감정으로 전반적인 삶을 비관할 수도 있었고, 김미리 작가처럼 다소 부족했던 공간 속에 나를 낳아 기른 부모님을 비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형 역시도 그러지 않았다.
앞서 말한 대로 내 생각이 짧아서였든 어떤 원인으로든 나는 그런 부정적인 생각들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었다. 한편으로 내가 강해서였다기보다는 순전히 운이 좋아서 그럴 수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저 이전까지는 좀처럼 함께하지 못했던 아버지를 집에서 자주 볼 수 있어서 좋았고, 힘든 와중에도 우리를 놓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어머니의 모습을 가까이할 수 있어서 좋았을 뿐이다. 그 공간이 어디였든 나에게는 아마 상관이 없었던 것 같다. 용변을 보기 위해서는 꽤나 험난한 여정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런 공간에서조차 말이다. 부정적인 부분보다는 긍정적일 수 있는 부분에 집중했었던 셈이다.
공간이 주는 영향이 크다고는 하나, 힘없는 어린 시절에는 어떤 식으로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설사 나처럼 당시에 긍정적인 부분들에만 주목할 수 없었다 하더라도, 훗날 우리는 지난날들을 돌아보며 긍정적인 해석을 얼마든지 내놓을 수가 있다. 다시 말해, 부정적인 감정에만 사로잡혀서 추억이 되기에 충분한 기억들을 악몽으로 남겨둘 것인지 여부는 그 당시에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만, 지나고 나서 되돌아보는 우리들은 악몽과도 같은 기억이라 할지라도 긍정적인 면들에 더 주목하려는 노력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순전히 운이 좋지 않아 어떤 공간에 대해 좋지 못한 기억을 가지게 되었다면, 그나마 긍정적인 기억의 조각들을 주워 담아 덧칠해 보는 것도 꽤 할 만한 작업일 것이 분명하다. 누군가에게 꺼내기도 힘든 우울한 이야기들을 마냥 쌓아나가는 것은 앞으로의 인생에 어떤 식으로든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충분히 오랫동안 우울했다면, 스스로 기억들을 재조합하려는 노력도 한 번쯤은 해볼 만하다. 그런 노력들을 거듭해가다 보면, 생각보다 바뀌지 않을 것만 같았던 인생 전반에서의 많은 부분들이 꽤나 긍정적인 부분으로 바뀌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