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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필 Oct 06. 2024

내가 전전해야 했던 공간들

집에 대한 이야기


나의 전학 여정은 경기도 시흥이라는 도시를 끝으로 마무리된다. 시흥 안에서도 총 세 번의 이사를 거듭하긴 했지만, 동네를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도시가 내 학창 시절의 마지막 도시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집'이라는 공간이 꽤나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어린 시절 나의 공간이 되어주었던 집들에 대해 종합적으로 이야기해 보는 것 역시 나름의 의미가 있다. 당시에는 집 자체에 대해서 그리 깊은 생각을 하지는 않았으나, 지나고 보니 나름대로 기억의 조각들을 살피면 집이 주는 무의식적인 영향이 없지는 않은 듯하다.


내가 나고 자란 경상남도 함안의 작은 동네에서 최초에 우리 집은 두 채였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대리점 한편에 딸린 작은 공간을 포함해서, 신축 아파트가 한 채 더 있었으니 말이다. 아버지 사업이 나름 번창하던 시기여서 짧지만 강렬하게 풍족했던 기억이 있다. 남부러울 것 없이 뛰놀았던 그곳 검암리에서 집이라는 곳은 하나의 놀이터이자 뛰놀다 마음껏 쉬어갈 수 있는 쉼터였다. 그러다 아버지 사업이 주저앉기 시작하면서 우리 네 식구는 슈퍼 마켓을 운영하게 되었고 그 슈퍼에 딸린 15평 정도 되는 집에서 생활을 했다. 이전과 비교하면 명확히 줄어든 공간이었지만, 여전히 부족함을 느낄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나와 형이 아직 어리기도 했고, 우리들만의 공간도 나름 있었으니 말이다. 때때로 화장실 하수구 구멍을 타고 들어오는 생쥐가 갉아먹은 비누의 흔적을 목격했던 어린 날의 아침은 그 시절의 꽤 충격적인 장면으로 기억 속에 남아있다. 그 때문에 이따금 커다란 생쥐가 쫓아오는 꿈을 꾸곤 했었다.


함안에서 야반도주를 감행하여 우리 가족은 목포로 이사를 갔다. 최초로 들어간 단칸방은 일주일도 되지 않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입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왔었는데, 천장이 문제였던 탓인지 방 한쪽 벽이 그대로 축축하게 젖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일이 있고 옮겨간 집(?)에서 우리 가족은 정착하여 1년 동안 생활했다. 그 집은 구조가 상당히 독특했었다. 대문까지 딸린 2층짜리 단독 주택이 있는 집에서 창고로 쓰던 별채 같은 방을 개조한 것이었는데, 입구부터 문을 열면 샤워와 세면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나오고 그 공간 뒤로 부엌 정도의 3평 남짓한 방, 그 안쪽으로 잠을 잘 수 있는 조금 더 넓은 공간이 이어져 있었다. 투 룸(?)이라고 봐야 하나. 더 놀라운 사실은 화장실이 집 밖에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와서 오른편에 창고를 개조했다는 우리 집이 있었고, 왼편에 시멘트로 대충 세워놓은 공중화장실과 같은 푸세식 화장실이 있었다. 아직도 새벽에 용변을 보기 위해 여정을 떠나면서 느꼈던 스산한 추위가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어떻게 살아낼 수 있었는지 감조차 오지 않는다.


애초에 낯선 전학지였기 때문에, 깊이 친해진 친구도 없어서 집으로 데려와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지만, 아마 있었더라도 데려오지 않았을 것 같다. 그 어느 집보다 집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했으니 말이다. 당시에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해서, 부모님을 원망하거나 하는 사태까지는 가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 나의 짧은 생각들에 오히려 감사한 마음도 든다.


두 번째로 전학을 갔던 남양주에서는 그나마 집다운 집에서 살 수 있었다. 여전히 작은 빌라였지만, 현관문을 열면 부엌과 함께 쓰는 공간이 나오고, 그 중심으로 형과 나의 방, 그리고 화장실, 안방 이렇게 세 공간이 시계방향으로 다 이어져 있었다. 삼촌네 가족이 당시 남양주에 살았기 때문에 그 부엌인지 거실인지 모를 공간에서 신문지를 깔아놓고 부루스타(휴대용 가스레인지)를 올려놓고 삼겹살을 구워 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근처에 천마산이라는 산이 있어, 주말이나 휴일 등산을 마치고 저녁에 도란도란 두 식구가 모여 식사를 함께 했었다. 꽤 괜찮은 추억이다.


그 뒤에 옮겨간 시흥에서도 나름 괜찮은 공간들에서 살아갈 수 있었다. 이름만 '아파트'였던 공간, 그리고 부모님이 잠시 식당을 차리게 되어 그 근처에서 머물렀던 빌라, 그리고 아버지의 사업 실패 이후 처음으로 가족들이 힘을 모아 장만할 수 있었던 지금의 아파트에 오기까지. 참 험난한 여정이었다. 


"그때부터 집은 그런 곳이었다. 누군가 푹 찌르면 울기보단 악을 쓰는 내가 마침내 울어지는 곳."


김미리 작가의 <아무튼, 집>의 짧은 구절을 우연히 접하고,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미리 작가는 집이라는 공간에 대해서 상당히 안 좋은 추억과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나의 어릴 적과 마찬가지로 화장실이 없는 집에서 살았다는 점, 자신의 방이 없는 집에서 살았다는 점에서 나 역시 그녀와 같은 기억을 갖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나는 그 당시에 그 정도로 철이 들지 않아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기에 그런 나의 무지에 감사할 따름이다. 되짚어 보면 그런 공간들에서 나나 형은 얼마든지 비뚤어질 수 있었다. 공간으로부터 비롯된 부정적인 감정으로 전반적인 삶을 비관할 수도 있었고, 김미리 작가처럼 이런 공간 속에 나를 낳아 기른 부모님을 비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앞서 말한 대로 내 생각이 짧아서였든 어떤 원인으로든 나는 그런 부정적인 생각들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내가 강해서였다기보다는 순전히 운이 좋아서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저 이전까지는 좀처럼 함께하지 못했던 아버지를 집에서 자주 볼 수 있어서 좋았고, 힘든 와중에도 우리를 놓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어머니의 모습을 가까이할 수 있어서 좋았을 뿐이다. 그 공간이 어디이든 나에게는 아마 상관이 없었던 것 같다. 용변을 보기 위해서는 꽤나 험난한 여정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런 공간에서조차 말이다.


부정적인 감정에만 사로잡혀 추억이 되기에 충분한 기억을 악몽으로 남겨둘 것인지 여부는 그 당시 어린 시절에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만, 지나고 나서 되돌아보는 우리들은 설사 악몽일지라도 긍정적인 면들에 더 주목하는 노력은 할 수 있다. 나처럼 운이 좋지 않아 어떤 공간에 대해 좋지 않은 기억을 가지게 된다면, 그래도 긍정적인 기억의 조각들을 주워 담아 덧칠해 보는 것도 꽤 할 만한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에게 꺼내기도 힘든 우울한 이야기들을 마냥 쌓아나가는 것은 앞으로의 인생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충분히 오랫동안 우울했다면, 스스로 기억들을 재조합하려는 노력도 한 번쯤은 해볼 만하다. 생각보다 바뀌지 않을 것만 같았던 인생 전반에서의 많은 부분들이 바뀌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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