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소외감은 견디기 힘들다
"그랬었나."
우리 가족은 시흥으로의 이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던 나는 입학일 전에 중학교 교과서를 받으러 따로 다녀와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학교로 향했다. 당시 나는 사복 차림이었고 학교에는 교복을 입은 중학생들로 북적였다. 2월 초였으니 학기 마무리 단계였을 것이다. 나는 교복을 입은 형님 누나들 사이를 유유히 비집고 교무실로 향했다. 얘는 뭐지? 하는 시선들을 한 몸에 받으면서 왠지 초등학교 4학년 첫 전학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다. 어린 나이에 나 홀로 교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중학교에 입성하여 학교를 걸어 다니는 것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었다. 나는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말에 의하면, 무사히 교과서를 십여 권을 가방에 한가득 담아 들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도착하자마자 엉엉 울었다고 한다. 내 기억 속에는 희미하게나마 존재하는 그때의 기억은 아직까지 뚜렷하게 나의 행동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왜 언제나 나만 그런 상황들에 처해야 하는지 많이 억울했었던 게 아닐까.
또래 친구들과 입학 일자는 같았지만 나의 출석 번호는 40번대였다. 정상적으로 입학 처리가 되었다면 가나다 순으로 해서 나의 성인 '신' 씨는 10번대나 20번대 초반이었어야 하지만, 뒤늦게 입학 처리가 된 탓에 전학생의 번호인 듯 가장 끝번호를 떠안게 되었다. 중학교에 입학했는데도 난 아직까지 전학생 타이틀을 제대로 떼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다행히 담임 선생님은 좋은 분이었다. 언제나 밝은 에너지를 내뿜는 체육 선생님이었고 덕분에 1학년을 아주 활기차게 보낼 수 있었다. 여태껏 쌓아온 인생 노하우를 바탕으로 수업 시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선생님의 두터운 신망을 쌓을 수 있었고, 수업 태도나 학습 습관이 어느 정도 잡혀있어 진도를 따라가기에 무리가 전혀 없었다. 성적도 40명 남짓되는 학급 내에서 5등 정도의 등수는 늘 유지할 수 있었다. 성실한 이미지를 잘 구축해 나갔고, 학급 임원은 되도록 맡지 않았다. 아이들 앞에 섣불리 나서는 행위가 나름의 리스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중학교 1학년 때 꽤 절친한 친구들도 사귈 수 있었다. 지금까지 연락하고 지내는 16년 지기 친구들은 내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보물이다. 약간 독특한 성격에도 늘 같은 자리에 머물러 나를 지지하고 응원해 주는 친구들에 새삼 고마움을 느낀다. 변덕스럽고 또 뭐 하나 꾸준히 못하는 성미를 받아주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1학년 때만 해도 천진난만하게 많은 친구들에게 주저 없이 먼저 다가가 친해졌었다. 다들 근처 같은 초등학교를 나온 친구들과 어울리기 바쁜 와중에, 혼자 한가로이 쉬는 시간을 흘려보내는 아이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홀로 시간을 보내는 슬픔이 어떤 것인지 잘 알았기 때문에, 나는 우선적으로 그런 아이들과 가까워지고 싶었다.
"넌 이름이 뭐야?"
중학교 2학년까지는 꽤나 평범한 나날들이 이어졌다. 공부 습관이 제대로 잡혀나감에 따라 성적도 계속해서 우상향 했다. 어느새 내 주변은 공부 잘하는 아이들로 둘러싸였고, 공부에 대한 이야기는 늘 자연스럽게 우리들의 대화 주제가 되었다. 2학년 담임 선생님은 음악 선생님이었다. 역시 좋은 분이었다. 공부를 잘하는 나를 특히나 아껴주었고, 나 역시 늘 시험 성적으로 보답했다. 어느새 내 성적은 전교권까지 올라 있었다. 특별히 학원이나 과외 같은 것들을 하지 않았지만, 수업 시간의 학습 태도, 그리고 언젠가부터 몸에 익은 예습과 복습의 효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공부 자체에 대해서 자신감도 붙었고, 웬만해서 이해하지 못할 문제는 없었다. 그렇게 2학년 2학기 기말고사까지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던 나는 다가오는 겨울방학에 예상치 못한 폭풍에 휩쓸리고 만다. 앞으로의 인생에서도 커다란 방점을 찍게 한 커다란 폭풍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