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내기 배움터를 뒤집어 놓은 늙은 신입생
어쨌든 대학에 입학하게 된 기존의 목표를 잊지는 말아야 했다. 어떻게든 졸업장을 따내어 글을 쓰는 소설가로서 이력을 한 줄 남기는 것이 표면적인 목표이긴 했지만, 대학교에 진학하지 않았더라면 접하지 못했을, 더 나은 배움에 대한 갈증을 채우겠다는 실질적인 목표도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에는 교육기관을 통한 가르침을 받아보지 못했기에 보다 전문적인 지식으로 한층 더 성장하고 싶다는 기대를 나름대로 품었더랬다. 그렇게 설레는 마음을 안고 대학교 캠퍼스로 들어섰다고. 집에서 학교까지 거리가 상당히 멀었던 탓에 우선적으로 기숙사 배정을 받아낼 수 있었다. 워킹홀리데이 시절 룸메이트에 대한 안 좋은 기억 때문에 2인 1실이라는 사실이 살짝 마음에 걸렸지만, 겪어보기도 전에 초장부터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으로 그런 마음을 애써 눌렀다. 룸메이트는 같은 학과 동기인 전라도 출신의 스무 살이었고, 배정받은 방도 둘이서 쓰기에 적당히 넓고 쾌적한 편이어서 일단은 안심할 수 있었다. 일본에 머물 때의 방과는 다르게 바퀴벌레도 함부로 기어 다니기가 힘들어 보이는 방이었다. 정말로, 다행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새내기 배움터'
기존 재학생의 주도 하에 다양한 오리엔테이션 프로그램들이 진행되었다. 재학생들이나 학생회 임원들이라고는 해도 나보다 두세 살은 기본적으로 어린 친구들이었다. 결론적으로 나에게 그들이 내세울 만한 점이라고는 학교에 머문 시간이 길다는 것밖에는 없었다는 뜻이다. 어떻게든 선배로 보이기 위해 애를 쓰는 그들의 모습이 꽤나 귀여워 보였다. 그래봐야 한두 살 차이일 뿐인 선배들인데, 신입생이자 후배들(나의 동기들)이 선배들을 대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며 진땀을 빼는 모습 또한 그러했다. 4년이라는 짧지 않은 군생활 속에서 제대로 된 상하계급 관계에서의 권력이 어떤 형태를 띠는지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었던 나로서는, 선배 노릇을 하려 하는 친구나 어떻게든 학생회의 품위를 드러내려 하는 친구의 모습들에 웃음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는 이 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의 권력이 꽤나 소중한 가치인 듯 보였다. 나는, 그런 권력이 울타리 밖에서는 아무런 쓸모도 없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지만, 내가 마주한 선배라는 이름의 그들과 후배라는 이름의 그들은 아직까지 깨닫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하긴, 아직 어리잖아. 그것이 내가 대학교에 들어서서 마주한 대학교 사람들의 첫인상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권력에 의탁해 무지막지한 힘으로 신입생들을 괴롭히거나 했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다만, 별 것 아닌 일들에 과도하게 신경을 쓰기도 하고, 고작 1~2년 차이의 학번들에 위로는 굽신거리거나 아래로는 대우받기를 원하는 모습들이 하나의 사회 실험과도 같이 느껴졌을 뿐이다. 그런 환경 속에 신입생으로 임해야 하는 나로서는, 그저 웃을 수밖에.
나의 동기인 18학번 신입생들은 당시에 아주 잔뜩 얼어 있었다. 새로운 환경에 미처 적응할 시간을 제대로 갖지 못한 채, 눈치 없이 예정보다 일찍 알을 깨고 나와버린 작고 소중한 병아리들과도 같았다. 행동 하나하나에 큰 제약을 느끼고 있는 듯했고, 고등학교 때와는 다르게 다소 자유로운 분위기에 어떤 식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주저하는 모습들이었다. 그렇다. 그들은 수능이라는 허들을 하나 넘었을 뿐, 스무 살을 넘겨 성인이라는 명찰만 부여받았을 뿐, 여전히 정신은 자신이 졸업한 고등학교 어딘가에 갇혀있을 뿐인 어린 소년소녀들이었다. 숱한 고난을 헤쳐 온 나와는 다르게 온실 속에서 화초처럼 부모님의 열렬한 도움을 받아 대학교에 발을 디딘 연약한 영혼들. 새내기 배움터는 그저 그들에게 고등학교의 연장선상 그 이상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하긴, 대학교라는 집단은 어디까지나 미약한 학생들에게 나름의 권리와 자유를 안겨다 주고 그들로부터 돈을 받아내면 그만인 학원일 뿐이다. 이런 곳에서 전문적인 교육을 기대해도 되는 걸까, 약간의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관계 자체에 서툴고 대화에 어색해하는 그들을 어느 정도 이끌어야겠다는, 알 수 없는 리더십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샘솟았다. 이미 사회 경험에 있어서 그들에 비한다면 백전노장과 다를 바 없었고, 다수가 모이는 장소에서 분위기를 휘어잡는 능력은 수많은 직장 상사들과 술자리를 함께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의 몸에 배어있었다. 하물며, 나보다 어린 친구들과 어울리는 자리라니, 그것은 나에게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쉬운 것이었다. 나는 그저 그런 본능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는 일말의 절제을 살며시 놓아주기만 하면 되었다. 4년간을 학교에 머물러야 하니, 동기들과는 나름의 친목을 다져놓을 필요가 있었으므로 나는 그렇게 기꺼이 광대를 자처했다. 준비된 모든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얼어붙은 분위기를 녹이기 위해 몸부림쳤다. 나 홀로 질주하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많은 동기들이 순식간에 나의 주변을 둘러싼 채 수군대면서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저 오빠 뭐야? 우리 동기야?
주변 동기들의 어색함은 일순 설렘으로 바뀌는 듯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적당히 설쳐야 했다. 학교 생활을 주도적으로 해나갈 정도로 내가 여유 있는 삶을 살아가지는 못할 것을 진즉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등록금과 생활비는 모두 직접 벌어가며 대학 생활을 유지해야만 했다. 지나치게 학교 생활(특히나 유흥 쪽으로) 자체에 재미를 들이거나 파고들다가는 그런 기존의 일상이 흔들릴 수도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약간의 절제를 곁들여야만 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다는 '적당히 나대기'를 나는 어찌어찌 잘 해내었다. 그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던 날, 나는 국어국문학과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단숨에 유명해졌다.
나는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꽤 친화력이 상당한 사람이었다. 어릴 적부터 낯선 환경들에 적응하느라 특히 그런 사람으로 자라오긴 했었지만, 나름대로 연륜까지 쌓아나가며 이십 대 중반이 되고 보니 그 능력은 어느새 절정에 달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나보다 사회적인 경험이 한참이나 부족한 친구들 사이에서 그런 능력에 더없는 확신이 생겨버릴 수밖에 없었다고. 앞으로의 대학 생활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들이나, 4년 만에 졸업을 한다 해도 스물아홉이라는 다소 부담스러운 아홉수를 지닌 채 사회에 다시 나가야 한다는 점, 그리고 막연한 그 뒤의 일들에 대한 걱정은 잠시 접어두고, 온전히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데에만 집중했었다.
다행히 어색한 표정들은 하나, 둘 사라져 갔고, 우리는 서로가 웃으며 인사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급격히 가까워질 수 있었다. 동기들의 중심에는 내가 있었고 다소 부담스럽다는 식의 농담을 건네기도 했지만 속으로는 내심 기쁘기도 했다. 일생에 그런 순간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저, 그런 순간이 찾아오면 반갑게, 그리고 기꺼이 즐길 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교류해 나갈 사람들에 대한 기대를 접어야 한다는 사실에 설렘의 일정 부분들이 흩어지는 듯도 했다. 내가 이 동기들이나 선배들로부터 무언가를 배워나가기는 힘들 것이 분명해 보였다. 스스로 사회에 나가 부딪치면서 깨달은 경험들로 단단히 무장하고 있었던 당시의 나에 비해, 그들은 대학교라는 울타리에 갇힌 너무나 여리고 부서지기 쉬운 존재들이었으니 말이다. 내가 그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파릇파릇한 젊음의 빛깔에서 비롯된 미완을 예찬하는 마음 정도밖에는 없을 것만 같았다. 이미 내가 지나온 길을 바라보듯, 미약한 젊음을 추억하는 느낌 정도만 받을 수 있을 뿐이겠지.
어엿한 신입생이었지만, 어쩐지 설렘보다는 다가올 현실적인 고민을 더해갈 날들이 쌓여갈 것이라는 예감이 앞섰다. 실제로 내 옆의 어린 동기들과는 완전히 다르다고도 할 수 있는 길을 헤쳐나가야 했기에, 그들과 계속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해 나가기도 힘들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서로의 시계가 다르게 흘러가니, 그저 그들의 길을 속으로 응원하면서 내가 나아가야 할 길에 집중하는 것이 최선이었던 셈이다. 처음부터 나의 목적과 목표는 그들보다 훨씬 더 선명하고 굵은 잉크로 새겨져 있었다는 사실도, 내가 그들과 같은 신입생 무리에 섞여들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