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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어쨌거나 대학은 가야겠지?

수능 성적표를 받아본 뒤, 고민 끝에 내렸던 결정

by 봉필


길고도 험난했던 3주간의 인도여행이 마무리되었다. 즐거웠던 추억들을 뒤로한 채, 나는 또다시 인생의 기로에 서야만 했다. 인도 여행 기간 동안 OMR 카드에 의해 제대로 채점된 수능 성적표도 받아볼 수 있었다. 이제는 그 성적을 바탕으로 대학을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의 두 갈래 길 앞에서 고민들을 펼쳐 하나하나 따져보는 일만이 남은 셈이었다. 처음 수능 시험을 준비할 때만 해도 서울대가 아니면 가지 않겠다는 당찬 포부로 시작했었던 수험생활이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한두 문제 수준으로 서울대가 좌절된다면 연고대 정도는 노려볼 심산이었다(오만하지만 정말이었다고). 하지만, 그 마지노선마저도 처참하게 무너져버린 성적표 앞에서 나는 깊은 고심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만일 대학을 간다고 하면 서울 중상위권 정도의 대학이었고, 가지 않는다고 하면 지난 수험 생활은 아무런 성과도 남기지 못한 채 한 줌의 연기와도 같이 공기 중으로 소리 없이 흩어질 뿐이었다. 중학생 시절, 경제에 대해 공부해 나갈 적에 앞으로의 인생에서 '매몰 비용'에 대해서는 철저히 검토하지 않는 합리적 인간이 되겠노라 굳게 다짐했건만, 막상 과거를 돌아다보니 지나간 수험생활에 대한 보상심리가 샘솟는 것은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이 악물고 공부한 9개월이라는 시간이 아무런 성과도 보이지 못한 채 희미하게 흩어져버린다면, 왠지 흘러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아이고, 내 아까운 청춘- 하면서 땅을 치며 아쉬워하는, 뭐 그런 장면이 그려지기도 했고. 아무튼 나에게는 두 가지 후회가 주어져 있는 셈이었다.


대학을 포기하고 하게 될 후회와 대학에 간 뒤에 하게 될 후회


대개 이런 경우, 하고 나서 후회하는 쪽을 택하는 나였다. 해보지도 않은 것에 대해 지독히도 곱씹으며 후회하는 것보다야, 직접 경험해 보니 별로였다는 명쾌한 결론을 도출해 내는 쪽의 후회가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꽤나 깊은 고민 끝에, 나는 결국 대학을 경험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이왕 수험 생활도 견뎌낸 김에 대학 생활을 한 학기라도 경험해 본 뒤에 결정을 내려도 늦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아직 이십 대 중반의 나이였으니 몇 번의 부러짐에도 얼마든지 다른 재미난 일들에 열정을 불태울 수 있을 것이라는 어림짐작이었다. 남들이 생각할 때에는 20대 중반이라면 다소 늦은 때가 아니냐며 빈정거릴지도 모르겠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서른이 넘은 나이가 되어보니 20대는 어느 때가 되었든 언제나 맑고 푸르른 청춘이었다는 사실을 절절히 실감할 수밖에 없다. 충분히 과감했지만, 좀 더 과감했더라도 괜찮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지금도 여전하다. 잠시 깨어지고 쓰러진다 해도, 나이의 앞자리가 숫자 '2'를 나타내고 있다면 두려울 것이 없지. 40대가 되면 '3'을 그렇게 바라볼 것이고, 50대가 되면 '4'를 그런 식으로 바라보게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 아무튼, 나는 그런 생각들 끝에 서울대가 아닌(어차피 못 가는 성적이었지만) 다른 대학에 입학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받은 성적으로는 건국대 철학과와 국문과 사이에서 고민해야 했다. 우선은 철학과가 있는 모든 대학을 추린 다음, 성적에 맞춰 추려낸 결과였는데, 작년 입결(입시 결과)을 살펴보니 건국대 철학과는 약간 애매했고 국문과는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만한 성적이었다. 입학처에 몇 차례 문의해 본 끝에 건국대 국문과를 지망 중 하나로 써냈고, 합격할 수 있었다. 합격 결과 발표 이후에 공개된 자료를 토대로 철학과에 지망했어도 합격했을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이러나저러나 같은 학교에 들어가게 된 것이니, 사소한 전공에 대한 아쉬움은 그리 크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게 나는 건국대 국어국문학과에 약간의 장학금을 받으며 입학할 수 있었다.


입학까지 남은 기간 동안에는 쿠팡 워크맨(Walk man) 아르바이트로 등록금을 비롯한 학비, 생활비를 미리미리 채워나갔다. 1종 보통의 운전면허가 있기는 했지만, 택배 배달차를 운전하며 다니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부담스러워 옆에서 보조격으로 따라다니는 워크맨으로 지원을 하게 되었다고. 보통 새벽 4시 정도에 일어나 5시까지 출근을 해서 오전 내내 쿠팡 정직원 분과 함께 짐을 차에 싣고 배달을 나가는 루틴을 반복했다. 하나의 팀에 배정받아 매일 다른 직원분과 함께 돌아가며 배달을 나갔는데, 직원분의 업무 스타일에 따라 점심을 먹을 수 있는 날이 있었고, 그러지 못하는 날이 있었다. 정해진 물량만큼만 배달을 마치면 언제든 퇴근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일찍이 퇴근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은 점심식사를 쉽게 거르곤 했었다. 워크맨으로 일하는 내 입장에서는 물량 배달이 늦어 밤늦게까지 일을 하게 되는 경우에는 회사 방침상 초과 수당을 받을 수 없어서 식사를 거르고 차라리 일찍 퇴근하는 편이 훨씬 좋았지만, 그날 배정된 직원의 업무 방식에 철저히 따르는 수밖에는 없었다. 어딜 가나 노동의 현장에서는 불만이 쌓이기 마련이다. 그 정도면, 견딜 만한 편이었지.


같은 팀 내에서도 입이 거칠고 업무 스타일이 마구잡이여서 같이 일하는 워크맨들이 기피하는 직원이 한 명 있었다. 워크맨들을 부품 취급하며 이리저리 굴려대는 탓에 그 사람과 함께 일하는 날이면 어쩐지 일하는 내내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그래도, 잠깐만 몸담았다가 떠날 뿐인 곳이라는 생각으로 참아가며 견뎌보자는 마음을 먹었던 나였다고. 그러다 하루는 그 사람과 함께 일을 나가 잠시 담소를 나누던 와중에 놀랍게도 군생활 당시 같은 지역에 근무했었던 부사관 선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더랬다. 업무 분장이 명확히 달라 마주칠 일은 없었지만, 바로 옆 부대에서 근무했었던 선배였다. 거, 세상 참 좁구나. 더듬더듬 당시 군생활을 같이 했었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급속도로 친해졌고, 이후의 남은 기간 동안은 참 편하게 일을 해나갈 수가 있었다. 세상은 정말 좁았다. 그리고,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과 일을 한다 해도 정말로 죽으라는 법은 없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이미 군생활에서 일찍이 깨달았던 터였는데, 잠시 사회에 나왔다고 잊어버릴 뻔했구나. 인간은 정말이지 지독한 망각의 동물이 아닐 수 없다.


생각해 보면 군생활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였고, 그 이전이나 이후에도 몸을 쓰는 일을 참 좋아했었다는 생각이 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아르바이트 중에 가장 힘들다고 알려진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3주 가까이 경험해 보기도 했었고, 군생활을 할 때에도 몸 쓰는 작업들은 주저하지 않고 달려들어서 해치웠더랬다. 전역한 이후에도 고모부가 운영하는 공장에서 잠시 잡일을 도맡아 하거나, 용역 사무소에 찾아가 공사장에서 땀 흘리며 일용직 일에 뛰어들기도 했었다. 고된 작업 중에 먹는 점심식사나, 새벽에 일을 나가 해가 떨어질 때까지 온몸을 땀으로 적신 뒤 귀가하여 샤워를 마치고 퍼먹는 저녁밥이 그렇게 맛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전생에 칠반천역 중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노 젓는 수군과도 같은 막일을 도맡아 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땀 흘리면서 무언가 해나간다는 행위에서 나라는 사람은 나름의 희열을 느끼는 것일까. 그런 특성 덕분에 요즘 취미로 정착시킨 웨이트 트레이닝도 흥에 겨워 흥미를 붙여나갈 수가 있었다고. 이만하면 축복 정도로 받아들여도 되지 않을까 싶다.


시간은 흘러 어느새 입학 시기가 가까워져 있었다. 대학교 학생들의 커뮤니티로부터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주최하는 '새내기 배움터'라는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하라는 초대 메시지가 날아왔다. 내가 대학교에 들어가다니, 어쩐지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내 나이 스물다섯에 친구들은 모두 12, 또는 13학번이거늘, 18학번 신입생으로 대학에 갈 줄은 정말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었는데. 나름대로 고생해서 들어온 이상, 시간을 헛되이 하지는 말자고 다짐하며 나는 그렇게 대학교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KakaoTalk_20241128_234409391.jpg 2018년 어느 날, 건국대학교 캠퍼스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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