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여행의 재미는 사람과의 교류에 있다
아무리 험난하고 고된 여정일지라도 누군가와 함께라면, 혹은 오가면서 다른 루트로 힘겨운 여정을 이어가는 사람을 마주하게 되면, 그 자체만으로도 위로와 힘을 얻을 수가 있다. 자신과 같은 처지인 사람들에게 공감하고, 또 그들로부터 공감받으면서 우리는 힘겨운 나날들 속에서도 나아갈 수 있는 힘과 열정을 주고받으면서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비단 새로운 세상으로의 여행길에서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살아가고 있는 인생이라는 여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나의 인도 여행이라는 한 부분에서만 봐도 그렇지만, 나의 인생 전체를 통틀어서도 함께 하는 이들, 어쩌다 마주하게 되어 힘이 된 인연들이 없었다면, 나는 오늘날처럼 강인하게 인생에서 버텨내고 있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잊지 말자, 우리는 인간(人間)이라는 사실을.
인도에 도착해 가장 처음 머물렀던 빠하르간지의 한 민박집, 지금은 이름조차 기억이 나지 않지만 식당과 숙소를 동시에 운영하고 있는 꽤나 합리적인 곳이었다. 게다가 한국인 사장님이 운영 중이어서 이용하는 데에 조금의 불편함도 없었다고. 인도에 도착해 그 민박집에서 처음으로 맛보았던 인디카 쌀로 만든 제육덮밥이 기억에 남는다. 그 쌀 특유의 비주얼과 생각지 못하게 건조했었던 식감 덕분에 꽤나 충격을 받았지만, 맛 자체는 나무랄 데가 없긴 했다. 첫날 방문했을 때는 낯선 환경에 던져졌던 터라 좀처럼 제정신을 붙잡고 있지 못해 사장님과는 간단한 인사 이외에 별다른 이야기를 주고받지 못했었다.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하기 전에 그곳을 다시 찾았을 때에는 여행 중에 친해진 동생과 함께 꽤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다고. 그 마지막 만남에 대한 이야기는 후술하도록 하겠다.
인도에 발을 들인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 델리 관광을 할 적에 잠시 마주쳤었던 한국인 중년 부부가 있었다. 간디의 추모원인 '라지 가트'를 둘러보던 중에 두세 번 정도 우연히 마주치게 되면서 같은 나라의 국민을 낯선 타지에서 만났다는 기쁨에 함께 사진도 찍고(그분들한테 전송을 했는지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소소한 개인사까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처음 그분들을 마주쳤던 때에 같은 한국인이라는 말을 듣고는 관광 잘하시라는 간단한 말들을 주고받고 헤어졌더랬다. 하나, 연이어 두 번, 세 번을 우연히 델리 길거리에서 마주치게 되자, 이렇게 자주 마주치는 것도 인연이라며 사진이라도 한 장 남기자고 두 분이 먼저 요청해 왔었다.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고, 어쩐지 우리 부모님과 같은 연배인 것 같아 정감도 가서 웃으며 사진을 찍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눴었다고. 아마, 자신들의 아이들도 우리들과 같은 또래인데, 우리들처럼 씩씩하게 여행도 다니고 했으면 좋겠다는 식의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은데, 아쉽게도 글에 남길 정도로 명확한 기억까지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저 그런 분들과 조우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는 기억만이 맴돌 뿐이다. 한국에서 마주쳤더라면 그저 흔하게 지나쳤을 법한 인연이었을 텐데, 여행 중에 만나니 그런 분들 마저도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이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다. 여행은 언제나 평범함을 특별함으로 치환하는 신비로운 힘을 가지고 있다.
델리에서 3일 정도 관광을 마친 뒤에 우리는 인도 북부의 서부 도시 자이살메르로 넘어갔다. 그곳의 숙소 '포티야(Fotiya)'에서는 꽤 긴 시간 체류하며 즐거운 나날들을 보낼 수가 있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여전히 포티야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듯하다. 혹시나 인도 여행을 생각하고 있다면(여행 자체를 추천하지는 않지만), 자이살메르라는 동네에서는 무조건 포티야에 한 번쯤 가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식당의 음식도 훌륭하고, 숙박비도 저렴하여 머물기에 아주 좋은 곳이었다. 숙소 겸 식당인 '포티야'는 운영하는 사장의 이름을 그대로 딴 것인데, 직원들도 사장의 가르침을 받아서인지 한두 마디씩 훌륭한 한국어를 구사하고, 사장인 포티야는 외형만 제외한다면 억양과 말투, 제스처 모두 한국 사람과 크게 다를 바가 없으니 머무는 데에 불편한 구석은 전혀 없을 것이다. 포티야, 그리고 거기서 일하는 직원들이 항상 건강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자이살메르는 사막 지방에 세워진 도시다. 순전히 친구가 사막 한가운데에서의 하룻밤을 체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여행 계획에 포함시킨 동네였다. 그렇게 친구 덕분에 우리는 낙타를 타는 진귀한 체험과 함께 사막 한복판에서의 하룻밤이라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남길 수 있었다. 당시 나와 친구를 포함해 두 그룹이 함께 했는데, 서로 친구 사이였던 남자 동생 둘(처음에는 외모만 보고 우리보다 나이가 많은 형들로 오해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친구 사이였던 누나 둘이었다. 동생 둘은 고등학교 친구 사이로 당시 대학에 다니고 있는 상태에서 함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로 마음먹고 본격적인 준비 이전에 여행으로 환기를 하기 위해 인도에 왔다고 했고, 누나 둘은 지친 삶에 찌들어 다짜고짜 친구끼리 인도로 떠나왔다고 했다. 누나 한 명은 간호사를 그만두고 떠나왔고 다른 누나는 그런 친구를 따라온 선량한 직장인이라고, 본인 입으로 소개를 했었다. 우리는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그렇게 사막 한복판에서 하룻밤을 지새우게 되었다.
같이 따라온 가이드는 날이 어두워지자 불을 피워 분위기를 한껏 달아오르게 했다. 주변의 적막함 가운데 장작이 타는 소리가 타닥타닥- 기분 좋게 귓가에 울렸다. 불이 알맞게 피어오르자 가이드는 미리 준비해 온 치킨과 맥주를 우리들에게 나누어주었고 금세 취해 알아들을 수 없는 인도 노래를 흥얼거렸다. 인도 노래 두세 곡을 마친 뒤에는, 난데없이 우리나라 동요인 올챙이송(올챙이와 개구리)을 불러 우리를 포복절도케 했다. 도시의 불빛이 자취를 감춘 그 고요하고 새까만 하늘에 별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밝고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교과서에서만 눈에 담을 수 있었던 은하수가 쏟아져 내릴 듯 아름다운 광채를 뽐내어 어둑한 밤이었음에도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그전에도, 그 이후에도 그와 같이 아름다운 하늘은 눈에 담은 적이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만 같다. 눈부신 젊은 날의, 사무치게 눈부신 그 아름다운 밤하늘은 이 지구상에서 미지의 땅과도 같은 당시의 인도 사막 한복판에만 존재하는 게 아닐까.
'사막 사파리'라는 단톡방을 만들어 인도 여행이 끝난 뒤에도 우리나라에서 여러 차례 만남을 가지기도 했었다. 여타 만남들이 그렇듯, 어쩌다 시간이 안 맞아 한두 명이 빠지게 되고, 그러다 모이자는 약속도 뜸해지는 식으로 서서히 잊혀갔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나에게는 소중한 인연들로 기억 속에, 가슴속에 남아 있다. 녹록지 않은 현실을 살아내다가 잠시 환기를 위해 무작정 여행을 떠나왔다지만, 나에게는 그 도피자들이 험난한 여정 속에서 만난 소중한 오아시스와도 같았다. 다른 이의 삶을 듣는다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고, 또 즐거운 일이다. 내가 아닌 삶을 현실적인 틀에서 벗어나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일상 속에서 만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행이라는 특별한 계기는 험난한 현실 속에서 두르고 다녀야 마땅한 사회의 보호막을 잠시 거두도록 하니, 더욱더 진솔한 만남과 대화가 가능하게 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소중한 인연을 만들어가는 것은 어찌 보면 여행의 묘미이자 하나의 목적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사막 투어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우리들은 숙소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다가 루프탑에 위치한 식당 겸 카페로 올라가서 하루종일 일광욕을 즐겼다. 그러고 있는 동안에 나는 문득 재미있는 생각을 떠올렸다. 이 식당으로 올라오는 한국인들을 모두 모아서 저녁에 파티를 진행해 보자는 아주 흥미로운 생각을. 친구도 흔쾌히 동의했다. 우선은 지난밤을 함께 했던 사파리 멤버들에게 파티 소식을 알렸다. 다행히 모두 특별한 일정이 없다며 참석을 알려왔다. 최소 인원은 확보한 셈이었다. 머무는 동안에도 줄곧 식당 한편에서 책을 읽고 있던 묵직한 분위기의 누나에게도 말을 걸었다. 네 살 정도 연상의 누나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늘 아침에 식당으로 올라오면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책에 집중하고 있던 모습이 고고하면서 아름다웠던 사람이다. 깊은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긴 했지만, 그 날밤의 파티 이후로 특별한 연은 이어지지 않았다. 아무튼, 그 누나도 재미있을 것 같다며 나의 제안을 승낙했다. 그리고 연이어 식당을 찾았던, 유난히 말이 많았던 세 살 위의 형과 상당히 파이팅이 넘쳤던 다부진 체격의 두 살 아래의 동생까지. 그렇게 우리는 인도 한복판에서 한국인들만의 성대한 파티를 열게 되었다.
술값은 어떻게 계산했고, 음식은 어떻게 했는지, 대체 무슨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영업 종료 시간이었던 밤 10시를 훌쩍 넘겨 12시까지 파티는 이어졌고, 소화를 시킬 겸 파티가 끝난 뒤에 몇몇이 모여 밤동네 산책을 감행했던 기억은 남아 있다. 사람과 분위기에 얼큰할 정도로 취할 수 있어서 좋았던 밤이었다. 지금은 다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자이살메르를 거쳐 동쪽으로 나아가며 여러 도시들을 여행한 뒤, 마지막 도시 바라나시에서 머무르고 있을 때 지난 파티에서 뒤늦게 참석했었던 동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가 SNS에 올린 게시물을 보고서 자신의 귀국 일정과 우리의 귀국 일정이 겹치는 것 같다며, 공항이 있는 델리에서 만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델리에서 만날 약속을 잡았고, 귀국하는 비행기를 타기 전날 밤 우리는 그 동생과 만나 깊은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었다.
그 동생은 실로 대단한 친구였다. 포티야 숙소에서 그 동생을 처음 마주했던 순간, 100L는 거뜬히 되어 보이는 백팩을 홀로 메고 식당에 올라왔을 때부터 심상치 않은 사람임을 감지했었다고. 검게 그을린 피부와 어딘지 전문적인 탐험가의 냄새를 풍기는 복장, 그리고 그와는 상반되게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이 엿보이는 미소까지 장착한 녀석은 실로 만화 속 주인공 같은 친구였다. 약 4,300 KM에 달하는 미국 퍼시픽크레스트트레일(PCT) 종주를 앞두고 인도 여행을 예행연습 삼아 온 것이라고 했는데, 그 친구가 언급했던 PCT는 미국 서해안을 따라 남쪽의 멕시코 국경 부근에서부터 시작해 북쪽으로 캐나다 국경까지 종주하는, 실로 어마무시한 코스였다. 우리보다 어린 나이에 그런 놀라운 모험을 감행할 생각을 하다니, 자연히 형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며 농담을 건넸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친구와 내가 처음으로 들렀던 민박집에 자리 잡고 앉아 밤새도록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사장님까지 그 술자리에 가세했더랬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사실상 처음 만난 낯선 사람들끼리 무슨 할 이야기가 그리도 많았을까 싶다. 반대로 생각하면 너무나 낯설었기에 허심탄회하게 거의 모든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스친다. 너무나 사소하여 기억도 하지 못할 이야기들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술자리가 길어지자 사장님이 직접 군고구마까지 구워가며 부족한 안주를 채워주기도 했다. 그날밤은 군고구마만큼이나 참으로 달달한 밤이었다.
그 동생은 훗날, 실제로 목표했던 PCT를 완주해 냈으며, 어릴 적부터 꿈꿔온 구급대원이 되어 지금은 경상도 어느 지방에선가 근무를 하고 있다. 몇 년 전, 언젠가 합격 소식을 나에게 전해주었던 것을 마지막으로 지금은 연락이 끊긴 상태다.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겠지. 충분히 자신의 인생을 멋지게 가꾸어나갈 수 있을 만큼 훌륭한 사람이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함께 여행했던 친구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그 뒤로 녀석은 좋은 직장을 얻어 좋은 배필을 만났고, 순탄하게 결혼하여 세종시에 단란한 가정을 꾸려 멋진 가장이 되었다. 자신을 믿고 의지해주는 든든한 아내와 그 녀석과 똑 닮은 아들과 함께 성실히 인생을 살아내고 있다고. 중학교 때부터 친분을 이어와 지금까지 이 괴짜 같은 나란 놈과 친구를 해주고 있는 아주 좋은 놈이다. 이따금 인도가 그리워질 때면 연락을 주고받곤 한다. 아마도, 가정까지 꾸려버렸으니 그 녀석과 함께 인도를 다시 찾는 일은 앞으로 영영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오히려 지난날의 인도 여행은 더더욱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을 수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의 젊은 날의 패기와 열정, 그리고 무모함이 깃들어 있는 인도는 우리의 가슴에 살아 숨 쉬며 때때로 인생 속에서 우리를 미소 짓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