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공부만 할 수 없었던, 가난했던 대학생 시절
마치 일본 워킹홀리데이의 연장선을 거니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차이가 있다면 일본어나 중국어와 같은 외국어가 아니라 한국어를 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다는 정도려나. 수업이 있는 날에는 착실히 수업을 들은 뒤, 늦은 오후부터는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수업이 없는 날에는 밀린 과제를 한 뒤 오후에 아르바이트를 해나갔다. 그런 식으로 나는, 등록금과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주에 5일 정도는 부단히 아르바이트 가게에서 일을 해나가야만 했다. 다른 아르바이트생의 대타를 뛰어주느라 어떤 주는 일주일 내내 일을 했던 적이 있었다고. 1학기가 마무리된 뒤의 방학 동안에도 여전히 아르바이트 지옥에 남아 대학생들이 떠나간 시끌벅적한 대학가를 망령처럼 이리저리 떠돌아다녔더랬다.
나에게는 명확한 목표와 목적이 있었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목표를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등록금을 마련하는 일이 그 무엇보다 우선시되어야 했다. 대학 수업을 몇 번 듣다 보니, 단순히 '대학교 졸업'이라는 행위는 돈과 시간을 주고서 졸업장을 따내는 일 정도로 느껴졌었다. 게다가, 나의 시계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아이들보다는 5년은 앞서가고 있었던 터라 약간의 조바심도 없지 않았다고. 나이도 나이인 만큼 나의 졸업은 딱 4년으로 종결되어야만 했다. 그 이상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만큼 그들보다 훨씬 더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던 스물다섯의 봄, 그리고 여름이었다. 여의치 못한 형편과 환경 속에서 다소 허망한 목표를 품었던 탓에 갈수록 지쳐가는 나 자신을 돌보지 못했었다는 점에서 약간의 아쉬움이 남지만,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입학하자마자 그만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다시 돌아가도 그렇게 미친 듯이 바쁘게 살았겠거니.
고깃집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구인 공고 앱을 통해 기숙사와 가장 가깝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단번에 연락을 하여 면접 날짜를 잡은 뒤 가게를 방문했었다. 어떤 일이든지 해낼 수 있으며, 또 해내면 된다는 생각이었기에 가게에 대해서 사전에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은 상태였다고. 막상 면접날이 되어 그 가게에 들어섰을 때 비로소 그곳이 건대에서 꽤나 유명한 고깃집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아무래도 상관은 없었다. 장사가 잘 되는 곳이라면, 오히려 더 많은 시급을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지금은 왕래가 없는 당시 가게 매니저 형은 면접 당시 내가 부사관 출신에 나이가 많다는 점이 마음에 들어 곧바로 채용했던 것이었다며, 언젠가 뒤풀이 자리에서 술에 얼큰히 취한 상태로 이야기해 주었다. 상당히 바쁘게 돌아가는 가게였다. 모두가 무전기를 하나씩 차고 소통해 가며 일을 진행해야 하는 만큼, 일머리가 없는 사람이면 1-2주 만에 관두기도 했었던 꽤나 힘든 아르바이트였음은 분명하다. 실제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와중에도 수많은 아르바이트생들이 가게를 스치듯 거쳐가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보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중에서도 나와 동갑인 친구 한 명과 두 살 아래인 동생은 내가 대학에 머물렀던 1년 가까운 기간 동안 꾸준히 가게에서 일을 해냈었다. 당시 동갑인 친구는 같은 대학 수학과 4학년이었고, 두 살 아래인 동생은 체육교육과에 2학년으로 재학 중이었다.
워낙 바쁜 가게였다 보니 적응하는 데에 나름대로 애를 먹기는 했었지만, 3개월 정도가 지나자 일이 어느 정도 손에 익어 즐기면서도 일을 해나갈 수가 있었다. 특히나 나와 마음이 잘 맞았던 동갑내기와 체육교육과 녀석이 함께 일하는 날이면, 가게는 마치 한 몸이라도 된 듯 매끄럽게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흘러가곤 했다. 한 달에 한 번씩 월말이면 가게에서 아르바이트생을 대상으로 열리는 회식은, 대학 생활 중에 몇 안 되었던 고대하는 날들 중 하나였다. 대학가에서 소문난 맛집인 그 가게에서 맛 좋고 질 좋은 고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게끔 해주는 그날은, 가난한 대학생이었던 아르바이트생들에게 한 줄기 빛과 한 줌의 소금이라고 할 만했다. 가끔 매출이 잘 나온 달이면 가게에서의 회식이 끝난 뒤 사장님이 매니저 형에게 자신의 카드를 쥐어주는 날도 있었다. 그날은, 그야말로 성대한 파티가 열리는 날이었다. 해가 뜨는 것을 보겠다는 각오로 술을 들이부었으며, 정말로 날이 밝을 때쯤이 되어서야 해산을 했었던 기억이 난다. 늙은 나이에 들어간 대학이었지만, 나름대로 즐길 것들은 잘 즐겼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대학교 1학기는 그렇게 모든 것들에 대한 적응의 기간이었다.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또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1학년 수준에 맞는 필수 수강 과목들을 들으며 꽤 괜찮은 성적을 받아낼 수는 있었지만,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대학교 수업의 수준이 나의 기대와는 다르게 너무나도 낮았기 때문이다. 수업 시간에 중학생 아이들이 나눌 만한 주제로 토론을 한다거나, 너무나 자유로운 나머지 창작의 수준에 이르는 발표를 해내거나(잘 쳐줘봐야 중학생 백일장 느낌), 대학생들 간에 '족보'라 불리는 특정 교수의 매년 뻔한 과제나 시험 문제들을 사전에 익힌 뒤 풀어나가기만 하면 됐으니 말이다. 인생에 별반 도움도 되지 않는 수업이나 과제를 할 그 시간에, 주제와 관련된 유익한 유튜브 영상 한두 개를 보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할 것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고, 간신히 피땀 흘려가며 일궈낼 수 있었던 지난 1학기는 결국에 커다란 허무함과 쓸쓸함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이러려고 대학에 왔나 자괴감 들어.
그러는 와중에도 틈틈이 연애는 이어갔다. 1학기가 끝나갈 무렵 고깃집에서 같이 일하던 여자 아이의 소개로 같은 대학에 다니는 네 살 연하의 친구를 만날 수 있었고,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스물다섯 스물하나, 어느 유명 가수의 노래제목처럼 영원할 줄 알았지만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금세 찢어져 각자의 길을 걸어갔다. 대학 시절의 낭만이 눈 깜짝할 새 흩어지는 것처럼, 그렇게. 대학교 필수 낭만이라고 할 수 있는 캠퍼스 커플도 경험해 봤고, 값진 경험이라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에, 끊이지 않았던 밤샘 술 약속들, 그리고 2학기에 들어서는 철없던 룸메이트와의 생활에 답답함을 느껴 학교 근처에 자취방을 구하게 되면서 대학 시절에 즐길 수 있는 모든 낭만들을, 나는 완성시켰다. 짧다면 짧은 기간이었지만, 정말로 해야 할 것들은 착실히 해나갈 수 있었던 대학 시절이었다.
2학기에 들어서는 시시하기만 했던 1학년 수업들을 뒤로한 채 2, 3학년 수업을 마구잡이로 수강 바구니에 담았더랬다. 내 전공이 아니던 철학과 수업들로 빽빽이 채워둬서, 모르는 이가 내 수강표를 스치듯 본다면 철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인 학생의 수업 일정으로 착각할 정도였다고. 1학기 때 경험했던 수업이 워낙 성의 없게 느껴지기도 했고, 배움을 목적으로 온 대학에 이미 좌절과도 같은 실망을 겪은 상태였기 때문에 나름대로 대학 생활 자체에 희망을 품기 위한 하나의 몸부림이었다. 그래도 2, 3학년 수업은 1학년 수업과는 다르길 기대하는 마음을 품었던 소박한 몸부림. 하지만, 결과적으로 큰 만족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애초에 대학 교수들의 주목적이 자신의 연구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기에 어느 정도 이해는 갔지만, 과제 비슷한 것을 대충 만들어 학생들에게 던져주고 수업 시간은 철저히 자신이 연구 중인 것에 대해 자랑하는 시간으로 활용을 해버리니, 내 입장에서는 크게 가르침을 얻어간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가 않았다. 그 와중에 철학과 3학년 수업과정이었던 서양 현대 철학 수업에서 니체에 대해 깊이 있게 알아갈 수 있었다는 점은 좋았지만 말이다. 1년 간의 대학 생활에서 얻은 가르침은 '니체' 하나였다. 어찌 보면 충분했지만, 그 힘겨운 생활을 통해 얻어낸 것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초라한 것이기도 했다. 사실, 대학에 머물렀던 시간 동안 집에서 유튜브를 보거나 니체 관련 책을 독파해 나갔더라면, 보다 깊이 있게 알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은 좀처럼 지워내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매일을 빡빡하게 고생과 고난으로 채워갔었던 나날들의 성과나 결과가 한없이 초라했으니, 나는 또다시 좌절하고 고심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내가 생각했었던 고등 전문 교육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느껴지는 수업 수준에, 주변에 또래들(대부분 또래가 아니긴 했지만)을 통해서 배울 만한 가치들 역시도 감히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함께 머리를 맞대며 발전해 나갈 만한 사람들을 만날 것이라 기대했었던 나의 열정에 수차례 찬물을 끼얹었던 대학 생활이었다. 학교를 그만둔 뒤의 생활에 대해서는, 지친 마음에 막연히 공무원 같은 심심한 일들을 떠올릴 뿐이었다. 아무튼 대학교는, 내가 머물고 싶을 만큼 대단한 장소가 아니라는 사실은 명백해졌기에 퇴학이라는 결단을 내리는 것은 나에게 생각보다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그저 제자리에서 손을 들고 이렇게 말하면 되는 일이었지.
"교수님, 여기 퇴학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