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 나이 스물여섯, 또다시 시작된 방황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사는 건 어떤 느낌일까

by 봉필


공무원 시험 준비라는 명목으로 3개월을 보낸 뒤에도 내 인생은 쉼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아무런 목표도, 방향도 설정되지 않았지만, 어디로든 흘러가는 인생을 그나마 내 인생의 의도라는 큰 줄기와 크게 떨어지지 않은 정도로 돌려놓기는 해야 했다. 어쩌면 그런 계속되는 방황이 나의 본모습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그맘때쯤부터 하지 않았나 싶다. 좀처럼 그리기가 힘들었던 공무원인 내 모습과는 다르게, 방황하는 내 모습은 어느 시기에나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이었고, 동시에 잘 맞는 옷이라는 생각마저 들기도 했다. 나는 전생에 대한민국 대표 방랑 시인 김삿갓과 닮아있는 삶을 살았던 게 아닐까. 좀처럼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다양한 경험과 색다른 시도들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아나가며 삶을 노래했던, 그런 그의 의지를 자의로든 타의로든 이어받게 된 인생. 그런 상황들을 상정하고 나면 방황 속에서 불안해할 필요가 말끔히 사라진다. 이 삶은 애초부터 그런 삶이었으니 말이다.


약간의 고민을 거친 뒤에 나는 잠시 잊고 있었던 음악의 꿈을 다시 꺼내어 들었다. 그 길 자체는 당장의 고민들과 전혀 맞닿아있지는 않았지만, 대학교에서 소설가가 되기 위한 나름의 열정을 불태운 뒤여서인지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았다. 직접적으로 대학 생활 속에서 글을 써나가는 활동과 이어졌던 것은 아니었지만, 소설가로서의 이력을 채운다는 부분에서는 그와 관련된 노력이었기에 그 분야에서는 나름의 휴식을 필요로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말하자면 건전지를 갈아 끼우는 행동인 것이다. '글쓰기'라는 분야의 건전지의 에너지를 다 소진하여, '음악'이라는 건전지를 새로 갈아 끼워 넣은 셈이었다. 미약한 노력들이기는 했으나, 고등학교 시절부터 그런 식으로 음악과 글에 대한 열정을 번갈아가며 불태우곤 했었다고. 이번에는 음악적 열정을 꺼내 들어 불을 지필 차례라는 것을 경험칙상 느낄 수 있었다.


고등학생 시절에는 고등학교라는 환경에서 갇혀 지내는 시간이 지나치게 일상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터라 음악에 제대로 힘을 실을만한 여유가 없었던 게 사실이다. 인문계 고등학교의 야간 자율학습은 꽤나 그럴싸한 이유가 있지 않는 이상 반강제적으로 행해지며 학생들의 자유를 함부로 허락해주지 않았더랬다. 그런 부자유(不自由)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에 입대해야 했던 군대에서도 이어졌고, 여행을 다니는 중에도, 일본에 머무를 때에도 경제적인 여유나 바쁜 생활들 속에서 지속적으로 나를 따라다녔었다. 대학교 신입생 시절에는 나름의 용기를 내어 교내 밴드부 오디션에 참가하기도 했었지만, 바쁜 아르바이트 생활로 인해 너무나 쉽게 좌절되기도 했었다. 이래저래 정말 좋아하는 음악에 진심을 다할 수가 없었던 지난날들이었다. 그런 과거에 대한 보상 심리가 극적으로 치솟았던 시기가 바로 대학을 그만둔 직후였었다는 생각이다.


우선은 경제적인 문제부터 해결해야 했기에, 집 근처 고깃집 아르바이트로 저녁 시간대에 일을 해나가기 시작했다. 이미 대학 시절에 꽤나 장사가 잘 되었던 고깃집에서 몸을 굴렸었기 때문에 적응하는 데에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다. 그런 경제적인 활동을 해나가면서 시흥에서 멀지 않은 안산의 한 음악 연습실 공간을 대여해 하루종일 그곳에 틀어박혀 나만의 음악을 갈고닦아 나갔다. 고등학교 때부터 드문드문 외로울 때마다 집어 들기는 했었지만 좀처럼 시간적 여유가 없어 일정 수준을 한동안 벗어나지 못했던 기타 연주 실력도 서서히 끌어올려갔다. 어설픈 솜씨로 더듬더듬 작곡을 해나가기도 했고, 목청이 터져라 하루 종일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 어떤 강요나 제약, 혹은 책임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노래했던 시기였다. 진심으로 충만한 나날들이 그렇게 한동안 이어졌다.


오전에는 안산에 위치한 음악 연습실로 향해 음악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고, 저녁 시간이 되면 집으로 돌아와 저녁 식사를 마친 뒤 고깃집에 일을 하러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지극히 단순하고 반복적인 삶이었다. 음악을 열심히 해서 무언가 되어야겠다거나, 혹은 밥벌이 정도는 가능하게끔 관련 일들을 찾아 나선다거나 하는 구체적인 생각이나 계획은 애초부터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저 순수하게 음악에 대한 나의 열정을 그 좁은 연습실에서 마음껏 쏟아부었을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조금도 불안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크게 흔들렸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음악에 대한 열정을 다한 뒤에 찾아올 무언가를 기다렸을 뿐이었다는 생각이다. 지금껏 음악에 쏟을 열정과 시간이 부족했었으니 그 열망을 어떻게든 다 써버리는 것이 당시의 내가 해야 할 최선이라는 판단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그것들을 모두 소모하고 나면 찾아올 다음 흥미로 내 삶이 움직이게 될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확신도 있었다. 이전까지 그런 방식으로 잘 나아가 왔기에, 나의 삶에 대한 스스로의 믿음은 어느새 쉽게 꺾이지 않을 정도로 탄탄해져 있었던 것이다.


다가오지도 않을 미래나 벌어지지도 않을 일들에 대한 불안을 떠안은 채 주저앉아버리는 행위는 지독한 낭비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뚜렷한 확신도 없이 남들이 가는 길을 따라가다가는 경쟁에서 뒤처질 뿐이다. 그저 나는 언제나 당장의 순간에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들을 착실히 해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런 생각을 실천에 옮겨왔다. 남들의 기준에서 봤을 때, 그것이 현실감각이 있냐 없냐, 장래가 있냐 없냐 하는 쓸데없는 참견들은 나에게 전혀 고려해야 할 만한 것들이 아니었다. 어차피 내 인생에서 나보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삶에 대해 헤아리며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만만하지 않다. 인생을 다 살아내지도 못한 채 '평생직장'이라느니, '성공한 삶'이라느니 함부로 정의 내리는 사람들을 늘 경계하며 살아왔다. 백세 인생이라고들 하지만, 정말로 내가 백 살까지 살아갈 수 있을지는 이 세상 누구도 알지 못하는 현실이다. 당장에 내일 죽을 수도 있는 게 인생사일진대, 먼 미래까지 확정적으로 내다보면서 나아간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일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현재에 집중한다. 남들이 말하는 인생 성공 궤도나 안정적인 삶 같은 것들을 허상이라고 생각하며 당장의 순간에 살아 숨 쉬는 나를 믿고 나아간다. 확정적인 어느 미래를 그려놓고 그 결과만이 자신의 인생을 대변해 준다는 하찮은 믿음으로 하루하루를 허비해가고 싶지는 않다. 그 확정적인 미래에 닿기 전에 내 인생이 뒤틀린다면 영원한 실패자로 남을 뿐이지 않은가. 인생은 어떤 엔딩을 위해 모든 순간들이 존재한다기보다는, 모든 순간들이 명명백백히 의미를 지니고 있고, 그 순간들을 즐기는 데에서 진정한 인생의 참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주변에서 떠들어대는 특정 상태에 대한 로망이나 꿈, 혹은 기쁨, 행복과 같은 것들은 언제나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드라마틱한 순간 뒤에도 우리의 인생은 지겹게 이어지기 마련이니 모든 순간에 최선과 진심을 담아서 살아가는 게 그나마 이 부조리한 삶의 올바른 공략법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특정한 순간, 상태, 그리고 목표를 이루는 '순간'에 목매지 말도록 하자. 그 눈부신 순간이 지나고 난 뒤에 다가올 허무함으로 인해 인생이 잠식당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인생은 죽음이라는 끝을 향해 달려가는 마라톤이다. 이 정의에는 어떠한 예외도 존재할 수 없고, 우리는 거기에서 이탈할 수도,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다. '죽음'이라는 결승선이 언제 찾아올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이라는 결승선과 스스로 달리고 있다는 사실밖에는 확신할 수가 없다. 그렇게 달려가면서 마주하는 순간순간들은 정말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런 특성으로 인해 우리는 막연한 미래나, 명확히 뇌리에 박혀버린 과거에 집착하기도 하지만, 살아나가면서 그런 순간들을 눈에 담으려 노력하고 나름의 의미를 부여해보기도 하며 최선을 다해야 마땅하지 않을까. 그것이 미래의 어느 한 지점을 바라보며 현재를 희생시키는 것보다는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그 미래의 한 지점도 하나의 순간으로 지나치게 될 뿐이다. 때로는 심각한 실패에 주저앉을 수도 있겠지만, 실패 역시도 하나의 순간일 수밖에 없다. 살아만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다음 순간을 맞이할 수가 있는 인생이다. 지나치게 좌절할 필요도 없고, 과하게 기뻐할 필요도 없다. 그저 그 순간 내가 하고 싶은 것,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선택하고, 집중하면서 최선을 다한 끝에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괜찮은 삶이지 않을까.


명확한 꿈도, 미래도 그려내지 않은(애초에 제대로 그릴 수가 없지만) 상태로 음악 연습실과 고깃집을 오가는 나의 일상은 눈이 부시도록 찬란하게 흘러갔다. 비록 그런 순간들이 지금의 내 인생의 모습 속에 어떠한 성과나 결과도 가져다주지는 못했지만, 그 순간 자체로 진심과 최선을 다했었다는 점에서, 그 어떠한 후회도 남아있지 않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운 과거였다고 말할 수가 있다. 그 시절에 나의 음악적 열정은 어느 정도 소모되었고 그런 식으로 꽤나 열성을 기울였던 덕분에, 그 시간들은 음악 이외의 다른 분야에 내 삶을 온전히 집중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찬란하게 이어졌던 나의 방황은 정말로 예기치 못한 순간에, 예상치 못한 계기를 통해 마침내 끝을 맞이할 수 있었다.


KakaoTalk_20241202_203558505.jpg 2019년 여름, 음악 연습실


keyword
봉필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에세이스트 프로필
구독자 172
이전 13화결국 1년 만에 막을 내린 대학 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