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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1년 만에 막을 내린 대학 생활

여전히 뚜렷한 방향은 설정하지 못한 채

by 봉필


내가 대학교를 자퇴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기대 이하였던 대학교 수업도 수업이었지만 역시나 그 시간과 공간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컸다. 대학교에서 마주했던 사람들은 대체로 시시했다. 누구 하나 사연을 지닌 사람들이 없어 좀처럼 호기심을 품을 만한 대상을 발견하지 못했었다. 나름대로 지혜와 경험을 갖춘 똑똑한 사람들과의 즐거운 교류를 기대했으나, 내가 마주한 것은 그저 위태로운 눈빛으로 새로운 환경에 발을 들인 연약한 영혼들과 대학이라는 공간에 갇혀 세상 사는 진리라도 깨달은 듯이 자만하는 영혼들밖에는 없었다. 생각해 보면 내 기대가 너무나도 순진했던 것이었지. 애초에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아이들에게 무슨 지혜와 경험을 기대했단 말인가. 도무지 호기심이라고는 샘솟지가 않았던 존재들이었다. 거기에 더해 대학교 수업까지 지나치게 지루하거나, 성의가 없었던 것이다. 나름 한 분야에서 유명하고 인기도 많은 유튜버들이 설명해 주는 유튜브 영상이, 대학교 강의에 비해 훨씬 더 유익하다는 결론에 이른 것은 대학에 진학한 지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매일같이 의미 없이 이어지는 나이 어린 동기, 혹은 (마찬가지로 나보다 나이가 적었던) 선배들과의 술자리는 그런 허무감에 더 묵직한 공허를 더해주었다. 정말이지 그 어떤 것도 얻을 수 없었던 시간이었달까.


매 순간 빠듯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피곤한 일상도 퇴학을 향한 나의 결심에 단단히 한몫했었다고 볼 수 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아르바이트로 가득 채워져 있었던 나의 일상은, 내가 진정으로 대학에 온 목적의식을 희미하게 지워낼 만큼 내 정신을 온통 흔들어 놓았더랬다. 의미 없는 사람들과 의미 없는 지식을 나누기 위해 열심히 피땀 흘려가며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나의 몸과 마음을 더없이 무겁게 짓누르며 나를 주저앉게 만들었다. 그만두어야 했다.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충분히 대학이라는 곳에 대해 알았으니, 이 이상의 시간 낭비로 내 인생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단순히 소설가로서의 한 줄 이력을 채워 넣기 위해 몸과 마음을 갈아 넣어가며 목적 없는 삽질을 몇 년씩이나 해나갈 필요까지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그 시간에 한 줄의 이력보다 더 가치 있는 활동들로 인생을 채워가고 싶었다. 그저 졸업 하나만을 바라보며 귀찮다는 듯이 대학교 강의실로 터덜터덜 걸어가는 학우들과, 마찬가지의 걸음걸이로, 마찬가지의 길을 가고 싶지는 않았다.


다시 한번 되짚어보아도 1년간의 대학 생활 동안 내가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이미 느꼈던 적이 몇 번인가 있었던, 오직 녹록지 않았던 현실의 무게뿐이었다. 조금 더 여유가 있었다 해도 인생에 조금도 보탬이 될 리가 없는 학교에 잔류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좀 더 많은 선택지들 앞에서 조금 더 너그럽게 풍부한 고민을 해나갔을지도 모르는 일이기는 하다. 대학교까지는 당연히 부모님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고 단정 지어버린 철없는 영혼들 사이에서 꿋꿋이 홀로 그 모든 현실의 무게를 감당하는 일이 꽤나 버겁기도 했었으니 말이다. 나와는 달리 가벼운 인생의 무게들에서조차 죽는소리를 하는 연약하고 어린 동기들에게 어쩐지 고운 시선을 보내주기가 힘들었던 것도 나름의 이유라면 이유였다. 그저 고등학교의 연장선 위에 서서 여전히 인생의 진실된, 잔인한 무게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자체가 괴로웠었다고. 어쨌거나 삶에 진심을 다하지 않는 사람들을 곁에 두면 나 역시도 내가 모르는 새 거짓된 삶을 향해 나아갈지도 모른다. 그런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는 네 글자가 주는 두려움 속에서는 탈출을 망설일 필요가 조금도 없다고 할 수 있다.


현실적인 무게에 상당히 오랜 기간 짓눌렸던 탓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당시의 나는, 나의 성미와는 전혀 맞지 않는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자연히 떠올려 냈다. 조금의 여유도 없었던 막막한 현실 앞에 잠시 나 자신을 내려놓고 타협하고자 하는 의지가 다분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이래저래 경제적인 여유가 없었다는 점에서, 일본에 나가 지낼 때부터 언제나 일상이 흔들려 왔기 때문에 안정성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직업,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 이력만으로도 얻어낼 수 있는 직인 공무원을 목표로 하게 된 것이다.


기실, 안정성을 목표로 한다는 것 자체가 방황을 모티브로 삼고 있는 나의 삶에서는 하나의 일탈과도 같았다. 언제나 그렇듯 인생은 정반합을 거치며 그런 일탈을 바로잡아 가기 마련이다. 일평생 방황하는 삶을 추구해 온 내가 공무원이라는 직업에 큰 흥미를 가지게 될 리는 만무했다. 대학교에서 떠나온 뒤 3개월 정도 9급 공무원이 되기 위한 공부를 해나갔지만, 수능을 준비할 때만큼의 열정이 샘솟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잘못된 길로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은 상태에서 제대로 된 학업의 성취를 이뤄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3월에 치르는 9급 공무원 시험에 응시한 뒤 아무래도 내 길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으로, 공무원 공부 역시도 쉽게 내려놓았다.


그렇다고 다른 쪽으로 뚜렷한 길이 보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나의 방황의 길 가운데 공무원이라는 직업은 나의 성격상 적합하지 않다고 느꼈고, 어쩐지 공무원이 된 나의 모습을 그려볼 때마다 숨이 턱- 하고 막혔기 때문에 내려놓았을 뿐이었다. 애초부터 대학에서 보낼 4년을 생각했었으나 그 생각이 1년 만에 좌절된 뒤에 나아가야 할 길을 잃어버리게 된 것도 사실이라면 사실이었다. 단기적인 계획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리자, 앞으로의 인생길이 더없이 꼬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고심을 거듭해 나갈 수밖에 없는 건, 결국 나아가야 하는 인생이기 때문이지. 내가 멈춘다 해도, 나의 한정된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갈 뿐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예전의 열망들에 대해 곱씹어보기 시작했다. 여전히 나의 마음속에는 소설과 글에 대한 열망이 숨 쉬고 있었으나 꺼내어 힘을 싣기에는 아직까지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당장 해나갈 수 있는 일들을 고민해야 했다. 친구들은 대학을 졸업한 뒤 마침내 취직했다는 소식들을 하나 둘 전해왔다. 그들의 삶과 내 삶을 비교하며 조급해지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들에게 부끄러운 친구로 남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만큼은 은근히 샘솟았더랬다.


어쩐지 고등학생 시절로 되돌아간 듯도 했다. 여전히 인생을 살아가며 어떠한 확신도 손에 넣을 수 없었고, 오직 시간만 쏜살같이 흘러가버린 기분이었다. 아직까지 젊기는 했지만, 더 이상 어린 나이라고는 말하기는 다소 버거운, 스물여섯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부사관 전역을 하고, 자전거 여행과 일본에서의 삶을 거쳐 대학을 지나왔지만, 여전히 그때와 마찬가지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하다니. 인생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많은 경험들이 뒤엉켜 있었지만, 명확한 하나의 길로 나아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고심이 더 깊어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고등학생 때처럼 불안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숱한 경험들로 약간은 더 대담한 태도를 가질 수 있었던 스물여섯이었던 셈이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길은 만들어나가면 그만이었다. 철이 든 시기부터 내가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없었기에,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부딪치고 깨지면서 나의 마음속에서 울리는 소리들에 귀를 기울이면 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열여덟이든 스물여섯이든 그런 숫자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버티고 서서 꿋꿋이 어디든 걸어 나가면 반드시 길은 열릴 것이라는 믿음을 두 손에 꼭 쥔 채, 인생 한복판에 잠시 머물러 있었던 나날은 그렇게 또 시작되었다.


KakaoTalk_20241201_234137794.jpg 2018년 어느 날, 밤이 아름다운 건국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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