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다니아 쉬블리, 『사소한 일』
우리는 지금 세상의 비참함을 다루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과거로 돌아가서 더 많은 비참함을 들춰낼 필요는 없다. 그냥 그 사건 전체를 잊는 게 좋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둠이 집의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자마자 개 짖는 소리가 되돌아와 나를 괴롭히고, 동이 틀 때까지 내게서 잠을 빼앗는다. 난 (...) 집에 있던 지도를 모두 움켜쥐고 집을 나선다.(p.97)
오늘날 세상은 이미 충분히 비참하다.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난민촌에 날아드는 미사일. 우크라이나 어린이병원에까지 이어지는 러시아의 공습. 이 와중에 문학은 과거의 비참함을 들춰낸다. 우리는 왜 문학을 통해 과거의 고통을 소환해야 하는가? 이에 답하는 소설이 있다. 팔레스타인 출신 여성 작가 아다니아 쉬블리의 장편소설 『사소한 일』(전승희 역, 강, 2023)이다. 이 소설은 영역본으로 2020년 미국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작에, 2021년 부커상 국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다. 독일어판은 지난해 프랑크푸르트 리트프롬 협회가 주관하는 리베라투어프라이스(자유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을 이유로 주최 측에 의해 시상식이 일방적으로 취소된 바 있다.
“이 비참함의 진부함 앞에서, 글쓰기의 소명은, 다시 한번, 가로등을 켜는 사람의 것과 같다.” 작가가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열린 DMZ평화문학축전에 참가하여 발표한 글의 일부이다*. 이스라엘과 70여 년에 걸친 전쟁을 이어오며 이제는 폭력이 일상화된 고국의 현실을 문학에 녹여내는 작가.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가로등을 켜는 것’에 비유한다. 작가는 또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아랍어로 문학은 윤리와 같은 뜻입니다. 저는 그게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려서부터 환대의 한 방식이 문학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소설 『사소한 일』에는 이러한 작가의 문학관이 집약되어 있다. 암울한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가로등처럼 작은 빛을 선사하고, 하나의 윤리적 길잡이를 제공해 주고 싶은 작가의 마음이 담겨있다.
소설은 1949년에 벌어진 한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1949년은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독립전쟁’, 그러나 팔레스타인인들은 ‘나크바(대재난)’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전쟁이 일어난 지 1년 후다. 이스라엘군의 한 소대가 점령지인 팔레스타인 네게브 사막의 니림 마을에 주둔한다. 그곳에서 그들이 맡은 임무는 팔레스타인 첩자들을 찾아내어 제거하는 일이다. 어느 날 소대장은 아랍인 무리를 발견해 즉시 사살하고 함께 있던 한 아랍인 소녀를 생포하도록 명령을 내린다. 포로가 된 소녀를 소대원 중 누군가가 희롱한다. 소대장은 소대원들에게 말한다. 자신을 포함하여, 그들의 선택은 둘 중 하나라고. “소녀를 진지 식당에서 일하게 하든지, 아니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녀를 가지고 놀든지.(p.53)”
그리고 반세기 이상이 흐른 뒤, 이 사건을 추적하는 한 팔레스타인인 연구자 여성 ‘그녀’가 있다. 그녀는 팔레스타인의 ‘A구역민***’이다. 평화는 아직 오지 않았다. 폭격이 일상화되어 있고, 출근길 버스에서 군 정찰대가 무고한 시민에게 총구를 들이댈 수 있다. 어느 날 그녀는 신문에서 1949년의 ‘그 사건’을 접한다. 그녀가 그 사건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사소한’ 한 가지 사실 때문이었다. 그 사건이 벌어진 일자가 그녀의 생일과 일치한다는 것. 즉, 그 사건이 일어나고 정확히 사반세기 후 그녀가 태어났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믿는다. 사소한 것들에 집중하는 시각이야말로 “진실에 도달하는 유일한 방법이자 진실의 존재에 대한 확실한 증거”(p.88)라고. 그리고 ‘그 소녀’의 서사를 쫓아가기 위해 사건이 벌어졌던 니림, 이제는 행정구역상 C구역보다도 더 먼 곳이 되어버린 위험천만한 그곳으로 향한다.
옆 건물에 대한 폭격은 일례에 불과하다. 강간조차도. 그건 전시뿐 아니라 평상시에도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 병사들의 무리가 소녀 하나를 사로잡아서 사반세기 후 내가 태어난 날과 같은 날 강간하고 죽인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이 사소한 사건이 내가 아무리 잊으려고 노력해도 나를 괴롭힌다. (...) 그리고 사실 총체적인 진실에 도달하려면 이 사소한 단서보다 더 중요한 건 없을지도 모른다. 그 기사는 그 소녀의 이야기를 안 다루었기 때문에 총체적인 진실에 도달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p.90-92)
이 소설에는 가해자의 서사와, 먼 훗날 이를 추적하는 또 다른 피해자의 서사가 있다. 소녀의 서사는 끝내 드러나지 않는다. 소녀가 어떤 인간이었는지,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겨짐으로써 역설적으로 전쟁의 비극성을 강조한다. 대신 한 가지 진실만은 명료하게 남는다. 폭력과 억압은 끊임없이 반복될 수 있다는 것. 이러한 암울한 현실에서, 인간은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하는가? 작가는 가해자들의 서사를 통해 말한다. 스스로 윤리적인 ‘주체’가 되라고. 타인의 권위나 집단적 오판에 자신의 도덕성마저 내맡겨 버리는 ‘객체’로 전락하지 말고. 그리고 작가는 ‘그녀’의 서사를 통해 말한다. 서로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연대하라고. ‘그녀’가 니림의 폭격 속 생면부지의 노파에게 도움을 주며 ‘소녀’를 떠올리듯. 그래야 진실과 해법을 찾을 수 있다고. 그것이 ‘사소한’ 인간의 일상이 지닌 비범한 가능성이라고 말이다.
이 소설은 불편하다. 전쟁 범죄라는 과거의 고통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슴 아픈 폭력의 통시성 속에서 작가가 길어 올린 문학적 메시지는 빛이 난다. 현재 팔레스타인의 젊은 세대는 분쟁이 없는 시기를 겪어본 적이 없기에, 대다수가 폭력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이스라엘과 공존이 불가능하다는 비관론에 빠져있다고 한다****. 관성화된 절망 앞에서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작가는 현재와 공명하는 과거의 고통을 빌어와 전 세계의 독자들에게 묻고 있다.
*출처: 세계일보(2024.06.20.). <[삶과문화] 이 비참함의 진부함 앞에서>.
**출처: 한겨레(2023.10.24.). <시상식 취소당한 팔 작가 쉬블리…“때로는 침묵이 더 강해”>.
***서안지구(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지역이자 팔레스타인의 행정 구역)의 주는 오슬로 제2협정에 따라 3개의 지역으로 구별된다. A 지역은 서안 지구의 18%를 차지하며 팔레스타인 정부가 다스리고 있다. B 지역은 서안 지구의 22%를 차지하며, 팔레스타인 민간통치 하에 있지만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당국이 공동으로 보안을 담당한다. 동예루살렘을 제외한 C 구역은 서안 지구의 60%를 차지하며 이스라엘 민간청이 통치하고 있다. C 지역의 99%가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제한되어 있다.(출처: 위키백과)
****출처: 연합뉴스(2024.06.16.). <"이스라엘과 공존 불가능"…비관 빠진 팔레스타인 Z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