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쉐, 『격정세계』
문학이 좀처럼 널리 읽히지 않는 시대다. 인터넷 서점 ‘예스24’가 발표한 2024년 상반기 도서 판매 동향에 따르면, 종합 베스트셀러 100위권 내의 도서 중 소설/시/희곡 분야는 6종으로, 8위에 머물렀다. 1위는 단연 경제・경영 분야였다(총 13종). 지난해 말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국내 문학 서적 판매량은 반짝 급증하긴 했다. 그러나 내수 부진, 12월 비상계엄 사태 등으로 인해 또다시 하락세다*. 문학을 읽으면 힘겨운 우리 삶에 변화가 있을까? 여기에 답하는 소설이 있다.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꼽혀온 중국 작가 찬쉐(残雪, Cánxuě)의 장편소설 『격정세계』(강영희 역, 2024, 은행나무)다.
작가의 삶은 소설보다 더 소설 같다. 그녀의 나이 겨우 네 살 때 부모님은 노동교화소에 끌려갔고, 이후 그녀를 돌봐준 조모는 아사한다. 설상가상으로 그녀는 초등학교까지 밖에 나오지 못했다. 열세 살이 되던 해에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그녀는 선반 조립공, 재단사 등 온갖 노동을 전전한다. 동시에 그녀는 독학으로 문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글을 썼고, 서른둘에 등단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 대부분은 블루칼라 노동자들이다. 가족관계나 애정 관계 등에서 결핍이 있다. 생활의 풍랑 속에서도 문학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이어간다. 작가의 삶과 닮았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격정적 독서와 사랑으로 요약된다. ‘비둘기 북클럽’에 소속된 인물들이 문학을 읽고 열띤 토론을 이어간다. 문학을 통해 서로 사랑하게 된다. 주인공 ‘샤오쌍’은 자타공인 고급 독자로, 비둘기 북클럽에 영입된다. 서른넷의 그녀는 쇼핑몰에서 계산원으로 근무한다. 그녀를 둘러싸고 사각 관계가 전개된다. 그녀와 대학 동기이자 그녀를 북클럽에 초대해 준 원년 멤버 ‘헤이스.’ 샤오쌍은 헤이스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샤오쌍의 윗집에 사는 ‘이 아저씨’, 그리고 샤오쌍의 친구 ‘샤오마’와 미묘하게 얽혀있다. 샤오쌍은 헤이스와의 ‘썸’을 끝낼 수 있을까? 샤오쌍의 직장 동료이자 소설가 지망생 ‘한마’ 역시 북클럽 안에서 인연을 만난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이 소설의 답은 간명하다. 바로 ‘사랑’이다. 연인 간의 사랑은 문학과 독자, 작가 간의 사랑과 다를 바가 없다. 이를테면 한마를 사랑하게 된 ‘샤오웨’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한마와 문학은 하나이자 둘이고, 난 그 둘을 다 좋아한다는 뜻이에요(p.404).” 이때의 사랑은 “생각과 육체의 합일(p.530)”이다. 사랑하는 이는 우리의 머릿속을 지배한다. 육체적 갈망도 생긴다. 사랑을 나눌수록 둘의 세계는 점점 더 확장된다. 사랑하는 이를 닮은 아이를 갖고 싶어지기도 한다. 문학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다. 좋은 책은 읽고 나면 머릿속이 바쁘다. 탐독하고 싶다. 다른 이와 책에 대해 말과 글을 나누다 보면 사유가 확장된다. 나아가 새로운 글을 직접 써보고 싶어진다. 그래서 “문학은 확실히 사랑과 가장 비슷”(p.359)한 것이다.
그렇다면 문학은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는가? ‘그렇다’라는 것이 이 소설의 답이다. 그 이유는 문학평론가인 등장인물 ‘페이’의 말속에서 엿볼 수 있다.
사람에게는 생각과 격정이 있고, 이 두 가지는 종종 행동에서 동시에 발휘되지요. 즉, 서로 밀고 당기면서 함께 감정의 메커니즘을 구성합니다. 현대인은 어느 한쪽을 중시하거나 경시해서도 안되며 양쪽이 조화를 이루면서 목표를 향해 돌진해야 해요. 이런 상황이 바로 헤이스가 예전에 말한 ‘생활의 결계’입니다(p.261-262).
우리네 삶은 어떻게 흘러가는가? 생각과 격정이 서로 밀고 당기는 가운데 일어나는 목표 지향적 활동, 그것이 삶이다. 여기서 생각과 격정은 이성과 욕망, 정신과 육체 등으로 바꾸어 이해할 수도 있다. 인간은 삶 속에서 ‘결계’들을 맞닥뜨린다. 결계는 소설 내에서 ‘장벽’으로 이해된다. 삶의 장벽 앞에서 회피할 것인가, 아니면 과감히 나아가 이를 부술 것인가? 헤어짐이 두려워 그저 친구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연인으로 발전할 것인가?(샤오쌍과 헤이스) 평범하지 못한 부모의 선택이 내 삶에 준 상처에 계속 발목 잡힐 것인가, 아니면 사유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계기로 삼을 것인가?(헤이스) 우리의 선택에 따라 삶은 달라진다. 소설은 말한다. 문학이야말로 결계를 부수게 해 줌으로써 우리 삶을 바꾸어 준다고. 다른 어떤 거창하고 숭고한 의미보다도, 우리 삶을 실제로 바꿀 수 있도록 해 주는 것. 그것이 문학의 효용이다.
문학은 반드시 행복을 가져다준다. 작가는 말한다. 이를 위해 읽고 토론하고 또 써보자고. 그때 생겨나는 사랑의 감정은 마치 연인과의 사랑처럼 짜릿하다고. 이 소설은 메마른 현대인에게 보내는 격정적 문학 예찬이다.
늘 그래, 사랑은 고통을 자초하지. (...) 그렇다 할지라도 우린 전심으로 사랑에 휩쓸리고자 하지. 우리가 읽기와 쓰기를 갈망하는 것처럼. 사랑의 결과는 예측할 수 없지만 읽기와 쓰기는 반드시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게 다른 점이지. 바로 이 때문에 인류는 문학을 발명했어. (p.325-326)
*출처: ““소설 보다 현실이 더 소설”...시무룩해진 출판업계 ‘한강’ 효과 고작 1달”(매일경제, 2025.02.02.).
**참고: “만약 삶의 결계로 인해 지친 당신이 결계 앞에서 회피로 일관한다면, 항상 그런 상태라면 당신의 마음은 점점 더 딱딱하게 굳어질 것입니다. 지금 나는 언젠가 모든 결계가 더는 장벽이 아니라 거꾸로 내 행동의 동력이 될 것이라고 상상해요. 왜 이렇게 상상하면 안 됩니까?”(p.1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