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샌델, 『공정하다는 착각』
2023년을 살아가는 한국인들을 욕망하게 하고, 또 좌절하게 하는 것. 그것은 ‘능력’이리라. 학업 ‘능력’과 대학 수학 ‘능력’ 다음에는 취업 ‘능력’과 경제적 ‘능력’을 갈망한다. 내 아이에게 ‘능력’ 있는 부모가 되기를 원한다. ‘능력’ 때문에 우리의 어깨에 한껏 힘이 들어가거나, 혹은 반대로 한없이 움츠러드는 사회. 이 사회는 과연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인가?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원제: The Tyranny of Merit)』(함규진 역, 미래엔, 2020)이 던지는 질문이다. 하버드대 정치철학 교수인 저자는 『정의란 무엇인가』(이창신 역, 김영사, 2010),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안기순 역, 미래엔, 2012) 등의 저작으로 한국 독자들에게 친숙하다. 정의, 시장 논리 등 우리 사회에 시의적절한 화두를 던져왔던 저자. 『공정하다는 착각』의 화두는 ‘능력주의’다.
‘능력주의(meritocracy)’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를 분배하는 보상 체제를 말한다. 이는 본디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만든 용어로, 1950년대 후반 영국의 맥락과 연관된다. 당시 영국은 계급 체제가 무너지고 있었다. 노동계급과 특권층의 아이들이 진학 및 취업에 있어 나란히 경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환영할 만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영은 능력주의가 유토피아가 아닌 디스토피아를 초래할 것이라 예견한다.
샌델은 영의 예측이 틀리지 않았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능력주의의 ‘폭정’을 교육, 노동, 정치, 경제, 사회, 도덕의 측면에서 낱낱이 고발한다. ‘계급 없는 사회를 위한 교육’을 위해 도입된 SAT는 부모의 부를 따라가는 시험이 되었다. 노동 시장 경쟁에서 패배한 이들의 구직 포기와 ‘절망 끝의 죽음’이 양산된다. 승자에게도 오만과 불안, 강박이 남는다. 불평등과 양극화는 강화된다. 공동체 의식과 민주주의는 치명상을 입는다.
능력주의적 인재 선별기가 일을 마치면, 꼭대기에 오른 사람은 자신이 그 성공의 대가를 온전히 누릴 자격이 있다고 여기고, 밑바닥에 떨어진 사람도 다 자업자득이라고 여긴다. 이는 정치에 매우 유해하며 당파주의가 하도 팽배하여 이제 사람들은 (...) 지지 정당이 다른 사람끼리의 결혼을 껄끄럽게 보게 되었다. (...) 중요한 공적 문제에 대해 서로 합리적으로 토론하거나 심지어 서로의 의견을 경청할 힘조차 잃어버[렸다].(p.351-352)
능력주의는 성공을 오롯이 개인의 책임으로 돌린다. 샌델은 이를 비판한다. 능력주의는 재능의 우연성을 외면하고 노력의 중요성을 과장한다는 것이다. 내가 재능을 갖게 되는 것은 행운의 결과다. 하필 내가 사는 사회에서 그 재능의 시장 가치가 높은 탓에 후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것 또한 행운의 결과다. 어디 그뿐인가. 노력이 중요하긴 하지만 실은 그게 다는 아니지 않은가.
이 책의 의의는 능력주의 체제 자체를 치열한 공론의 링 위에 올린 데 있다. 그간은 주로 능력주의의 방법론적 측면에만 여론의 관심이 쏠리지 않았는가. 입시 스캔들, 취업 비리 등의 뉴스가 터질 때마다 그랬다. 샌델은 프레임 전환에 성공했다. 그리고 이 링 위에서 능력주의의 대안 쪽, 즉 재능과 성공이 개인의 몫만은 아니라는 쪽에 판정승을 선언한다.
다만 샌델은 능력의 영향력을 완전히 배제하자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좀처럼 맞수가 없었던, 그래서 오만에 이른 능력주의에 통렬한 의문을 제기해 보자는 것이다. 또한 링 안을 관전하는 독자에게 교육과 노동에 대한 사회적 숙의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입시제도와 조세제도에 나름의 대안도 제시한다. GDP와 낙수효과를 넘어 공동선(共同善)과 민주주의에 대해 고민해 보자고 말한다.
이 책은 주로 미국의 상황에 기초하고 있지만, 현재 한국 사회와의 ‘싱크로율’은 매우 높다. 최근 횡행하고 있는 ‘각자도생’ 담론을 떠올리게 한다. 대입제도 개편안이 발표될 때마다 벌어지는 정시-수시 논쟁도 떠오를 수밖에 없다. 금융투자소득세, 다주택자 과세 논쟁도 마찬가지다. 미국 못지않게 유구한 한국 사회의 능력주의의 역사를 톺아보게 한다.
그리고 이 책은 현재 우리 사회가 지향하고 있는 바를 점검해보도록 한다. 고군분투하는 모두의 인정투쟁이 공동선의 관점에서 나름의 인정을 받는 사회로 가고 있는지를. 출세한 건물주가 되지 못한 내 탓이라며 만사에 홀로 좌절할 수밖에 없는 사회가 아니라, 서로의 노동에 존엄과 감사를 표할 수 있는 사회. 그저 빵 만드는 일이 좋아 열심히 일하던 젊은이가 자신이 선택한 직장에서 기계에 몸이 끼일 걱정 따위는 하지 않을 사회 말이다.
배관공이나 전기기술자, 치과위생사 등이 되는 법을 배우는 일은 공동선에 기여하는 훌륭한 과정으로 존중받아 마땅하다. SAT 점수가 낮은 사람이나 아이비리그 대학에 갈 만한 재력이 없는 사람이 울며 겨자 먹기로 선택하는 과정으로 여길 게 아니라 말이다.(p.297)
이제는, 승자의 도취상태에 빠진 능력주의의 폭정에 의문을 제기해 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