옌롄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그는 류롄의 면전에 서 있었다. (...) 처음으로 그녀의 침실에서 그녀의 검소함에 감동하고 있었으며, 처음으로 그녀를 향해 숭고한 경의를 표하려는 순간이었다. (...) 하지만 벽에 쓰여 있거나 신문에 게재되거나 책에 인쇄되거나 확성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방송 같은 말들에서 벗어나는 순간,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p.35)
마오이즘(Maoism)과 문화대혁명(1966~1976)의 광풍이 몰아치던 중국. 마오쩌둥의 말과 글이 곧 유일한 교과서이자 공영방송이었던 시대.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爲人民服務)’는 슬로건 하에 개인의 행복과 존엄은 ‘혁명의 대의’에 비하면 하잘것없이 여겨지던 시대. 여기, 그 시대의 상흔을 그려내며 전체주의에 경종을 울리는 소설이 있다. 홍위병들의 패악이나, 지식인 대상의 집단 조리돌림 이야기가 아니다. 두 남녀의 지극히 내밀한 사랑 이야기다. 중국 문단의 거장 옌롄커의 장편소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김태성 역, 웅진지식하우스, 2008)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우다왕’이라는 이름의 스물여덟 살 남성이다. 그는 자타공인 모범 군인이다. 그의 소망은 하루빨리 진급하여 처자식과 함께 도시에 터를 잡는 것이다. 장인과 아내는 늘 성화다. 취사 분대장 자리를 간신히 꿰찬 그는 사단장의 사택에서 취사를 담당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단장의 젊고 아름다운 아내 ‘류롄’을 만난다. 남자로서 만족을 주지 못하는 남편으로 인해 그녀는 늘 외롭다. 어느 날 사단장이 베이징으로 두 달간 출장을 떠나게 되고, 사택에는 우다왕과 류롄 둘만 남게 된다. 두 사람은 사택 안에서 농염한 ‘시한부 밀애’를 시작한다.
1호 원자* 밖에서는 혁명과 투쟁이 활활 타오르는 불꽃처럼, 흐드러지게 핀 띠꽃처럼 큰 강이 되어 남북으로 굽이쳐 흘렀지만, 1호 원자 뜰 안은 전과 다름없이 무릉도원(武陵桃源)인 듯 녹수청산(綠水靑山)인 듯 몽롱한 사랑과 시적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p.23)
사단장의 사택인 1호 원자의 안과 밖은 뚜렷하게 구분된 두 개의 사회다. 원자의 안은 우다왕과 류롄 두 개인의 사회다. 이곳에서는 오직 둘의 사랑만이 진리다. 둘의 신분과 권력 차이도 침대 위에서는 무위가 된다. 떳떳하지 못한 사랑이기에 미래는 비루하나 역설적으로 현재는 그 자체로 소중하다. 이에 반해, 원자 밖은 병영사회다. 마오쩌둥의 말은 곧 신성불가침의 진리다. 계급체계와 상명하복이 철저하다. 현재는 미래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개인은 각자의 욕망을 지닌 주체가 아니라 ‘혁명’의 대업을 이루기 위한 무수한 부속품 중 하나다. 원자 안과 밖의 대비는 문화대혁명 당시 삼엄한 전체주의로 인해 고립되고 은폐될 수밖에 없었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은유다.
이 소설은 전체주의에 대한 옌롄커의 강렬한 문학적 저항 그 자체다. 저자의 비판이 절정에 달하는 부분은 우다왕과 류롄이 마오쩌둥의 조각상과 각종 선전 문구들이 쓰인 집안의 물건들을 부수고 망가뜨리는 장면이다. 당시로서는 ‘반동분자’로 몰려 총살형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오로지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는 것에만 몰두했던 두 사람에게 그간 그토록 신성시되던 모든 물건은 유치한 사랑싸움의 도구로 전락한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문구가 새겨진 나무 팻말만이 화를 면하여 선전물이 아닌 사랑의 추억으로서만 기능한다. 이 대목은 문화대혁명 당시 벌어졌던 참혹했던 문화적 자산의 파괴에 대한 일종의 애도이자, 우상숭배에 대한 희화화이기도 하다.
그녀는 우다왕 앞에 [마오 주석의] 금빛 조각상을 내려놓더니 망치로 조각상의 코를 내려치면서 말했다. "자네가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 그는 세숫대야에 쓰인 ‘사리에 대해 투쟁하고 수정주의를 비판해야 한다(要鬪私批修)’라는 마오 주석의 어록 다섯 글자 위에 붓으로 ‘자신의 사리를 추구해야 한다(要自私自利)’라는 다섯 글자를 써놓았다. (...) 그녀는 마오 주석의 어록이 새겨진 차 항아리에 붓으로 마구 낙서를 한 다음 자신이 매일 하반신을 씻을 때 쓰는 자기(瓷器) 대야 안에 던져버렸다.(p.201)
이쯤 되면, 이 소설이 중국에서 2005년에 발표되자마자 금서로 지정되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을 수도 있다. 마오쩌둥의 ‘위대한 명제’인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를 폄하하고 혁명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이 소설은 출간 즉시 전량 회수되었고, 홍보와 비평, 게재, 각색마저 금지됐었다. 실제로 옌롄커는 현재 중국 본토에 거주 중인 작가 중 금서 조치 된 작품이 가장 많은 작가다. 그러나 문학을 통해 “존재하지 않는 진실,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 진실에 가려진 진실**”을 추구하는 그에게, 세계 문단은 극찬을 멈추지 않는다. 2013년과 2016년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최종심에 오른바 있는 그는 노벨 문학상의 유력 후보로 점쳐지기도 한다.
개인의 존엄과 행복을 짓밟을 권리가 있는 집단적 이데올로기는 과연 존재하는가. ‘혁명’의 광풍 속에서 파국을 향해 내달리는 우다왕과 류롄의 사랑을 따라가다 보면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다.
*院子, 마당을 갖춘 한 가구 또는 다가구 주거형태로 구시대 중국 특유의 주거방식(원문 주. p.23)
**출처: 「中현대문학 거장 옌롄커 단독 인터뷰 "문학은 정신의 밥…가려진 진실까지 드러내야"」(매일경제,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