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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영어 교사 Nov 21. 2020

교사로서의 ‘선택과 집중’

그 애가 학교에 온다니, 대체 왜?

나는 ‘선택과 집중’을 좋아한다.
끈기와 집착이 부족한 나는 포기에 익숙했고 관대했다. 잘할 수 있는 일에 힘을 쏟으면, 다소 부족한 부분이 보완이 되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수능을 준비하던 고3 여름, 나는 과감히 수학을 ‘포기’했다. 그리고 국어와 영어 성적을 통해 서울에 있는 대학에, 내가 희망하던 학과에 진학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내가 좀 더 어렸을 때 이혼하셨다. 원양어선을 타시느라 관계가 소원했던 아버지와 함께 한 시간이 길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당연히 어머니를 선택했고, 모자 관계에 집중했다. 아버지를 ‘포기’해버린 그 선택은 어느 한 쪽에는 슬픔이었겠지만, 나는  둘 사이에서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았다.

교사가 된 이후 학생들을 대함에 있어도 언젠가부터 ‘선택과 집중’이 작용했다. 30여 명의 학생들 중에는 매년 유달리 마음이 가는 아이들이 있었고 상대적으로 소원해지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래. 모든 아이들이 나를 좋아할 수는 없지. 세상에는 나와 맞는 사람이 있으면 맞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게 당연해. 포기하자.’ 라며 관계에 선을 그었다. 그 선의 한쪽에는 내가 선택한 아이들, 반대쪽에는 살짝 손을 놓아버린 아이들.

교사 답지 않은 처신에 대해 스스로 부끄러웠고, 나는 창피함을 이겨내기 위해  선택한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면제부를 받고자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히 내 품 속에 있는 아이들과는 더더욱 가까워졌고, 그 아이들이 진급을 하거나 졸업을 하며  교실을 떠나갈 때 한 없이 우울했다.
내가 품지 못한, 포기해버린 아이들과의 관계는 점점 더 멀어져 갔다. 그렇다고 티를 냈던 것은 아니었지만 최선을 다하지 않음이 아이들에게 느껴졌던 것 같다. 상대적인 박탈감과 이에 대응한 반발심이 아마도 그 아이들 마음속에 커져갔을 것이다.

매년 2월 내가 느낀 상실감과 아이들의 해방감의 합은 항상 0보다 적었다.

며칠 전 한 졸업생에게 카톡이 왔다.
<선생님 이번 주 목요일에 뵈러 가도 되나요?>
<당연하지. 언제든지 와.>
<아 선생님 근데 J라는 친구 기억하시죠? 그 친구도 같이 오고 싶다고 하는데 어떡하죠?>


순간 3년 전 교실 속에서 J라는 아이를 마주했다. 언젠가 나는 별일 아닌 일로 그 아이를 심하게 혼을 냈고, 그 이후 우리는 서로를 공기처럼 대했었다. 다른 아이들, 즉 내가 선택한 아이였다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나도, J도 알고 있었다.
<선생님은 저를 공기처럼 대하시잖아요.>
울먹이며 말을 하던 아이의 눈에서는 눈물이 보였다. 흐르지 않았던 것은 그 아이의 자존심이었을 것이다.
<네가 어떻게 행동했는지는 알고 있니?>
대화는 성숙한 성인과 예민한 고3 학생과의 대화라기보다는 동년배의 감정싸움처럼 흘러갔다. 그 대화를 마지막으로 J와 이야기 한 기억이 없다. 형편 없는 교사가 되버렸다는 자책으로 아이들을 졸업시켰다.

새 학기는 언제나처럼 돌아왔고, 나는 나대로 ‘선택과 집중’을 반복하며 살아갔다. 그런 J가 학교에 온다니. 물론 나를 만나러 오는 것은 아니겠지만 마주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나는 미성숙하고 형편 없는 교사로 살아가고 있음을 드러내고 인정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응. 당연히 괜찮지. J도 꼭 같이 와. 다른 선생님들도 보고 싶어 하셔.>
답장을 보낸 후 어쩔 줄 몰랐다. 괜히 불편한 모습 보이지 않게 교무실에서 나가 있을까? 그날 갑자기 몸이 아프다 하고 하루 쉴까? 몇 년이 지났으니 나한테 더 이상 서운해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 이런저런 생각에 몸을 뒤척이다 와이프한테 물었다.


<자기는 선택과 집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좋지. 잘하는 데 더 집중할 수 있잖아.>
<근데 그걸 사람들과의 관계에 적용한다면 어때?>
<그건 아니지. 관계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와이프 말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했다. 매년 나를 담임으로 맞는 아이들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나 역시 입맛에 맞는 아이들로 우리 반을 만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서로 피치 못해 우연히 만났고, 서로가 노력하면서 관계를 발전시켜나가야 했다. 어쭙잖은 자존심으로, 학생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회피로 ‘선택과 집중’ 운운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매년 30여 명의 아이들이 나를 찾아왔지만 일부는 자신을 사랑하는 담임 없이 1년을 보냈다.



왜? 담임이 나를 선택하지 않았으니까.

근데 담임이 대체 무슨 권리로?


학교에 와서 J에게 손편지를 썼다. 그때 우리의 관계가 망가져버린 건 내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었다고. 조금 더 성숙한 교사였더라면 너의 한 해가 그보다 즐거웠을 것이라고. 다시 찾아와 줄 용기를 내서 정말 고맙다고. 아프게 해서 정말 미안하다고.


편지는 아직 내 서랍 속에 있고 J는 학교에 오지 않았다.
처음 오겠다는 친구가 갑자기 일이 생겨 다음에 오겠다는 연락을 한 것이다. 그 말이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니면 J가 아직 마음을 풀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내심 서운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숨통이 조금 트이는 느낌이었다. 미안한 마음을 전달하겠다는 결심은 했지만 실행하기에는 아직은 미숙하기 때문에.
우선은 지금 내가 맡고 있는 아이들을 돌아볼 시간을 갖고자 한다. 내 ‘선택’에서 벗어나 ‘집중’ 받지 못한 친구들을. 쉽지는 않겠지만 모든 아이들에게 사랑을 집착하는 교사가 되고자 한다. 상처가 되겠지만 아이들에게는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  ‘집중과 집착’으로 아이들을 대함으로서 다가올 J와의 만남을 연습할 것이다.
<덕분에 좀 더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있었어. 고마워.>
이 말을 꼭 전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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