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 1월 1일
아침 6시 30분, 머리맡 휴대폰 진동소리에 잠에서 깬 진영은 짜증이 났다. 졸린 눈을 비비며 핸드폰을 들었고, 화면에는 저장되어 있지 않은 전화번호가 통화 수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들 자고 있는 시간이라 거절 버튼을 누르려다 생각을 바꾼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새해 첫날 아침부터 전화하기는 용기가 필요했으리라. 가벼운 일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난다.
딱딱한 돌로 된 소파는 분명 어젯밤 진영이 설정한 온도보다 3도 정도 더 높은 온도로 달궈져 있었다. 진영은 민영과 민영의 가족들이 청하지 않은 친절로 사람을 당황시킨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처와 장모, 전기장판으로 사위를 태워... 사위는 혼수상태’ 같은 기사의 주인공이 되지 않을까 킬킬대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거실 바닥에 누워 잠든 민영의 장모가 혹시나 깰까 봐 까치발로 걸어 나와 어둠 속에서 겉옷을 찾는다. 머리끝에서 종아리까지 몸을 덮어줄 패딩을 들고, 현관으로 가 보안키를 누른다. ‘띠링’ 소리가 크게 울린다. ‘온 집 사람들 잠을 다 깨워버렸군’, 엘리베이터 1층 버튼을 누르고 눈을 감는다. 무거운 쇳덩어리가 아래로 자신과 떨어져 내리는 느낌은 항상 편안함을 준다.
1월의 첫째 날, 새벽 공기는 밤새 얼어 있었고 주차장은 지난밤의 어둠이 끈덕지게 붙어 있었다. 완공된 지 20여 년이 지난 아파트는 주차장과 집들 사이 간격이 너무 가까웠고, 통화 소리에 잠이 깬 누군가에게 욕지거리를 듣지 않을 만한 장소를 찾아야 했다. 단지를 둘러싼 길을 따라 걸어 나와 외부 출입구와 맞닿은 주차장으로 갔다. 휴대폰을 꺼내려 주머니를 뒤지다 무의식적으로 담배 하나를 꺼낸다. 끊어야겠다고 생각한 담배에 아무 생각 없이 불을 붙이려다 말고 휴대폰 화면의 부재중 전화번호를 바라본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였지만 무언가 낯이 익은 끝자리 네 개의 숫자. 불안한 마음 반, 기대 반으로 전화를 건다.
전화를 걸자마자 반대쪽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꽤나 초조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상대의 불안은 언제나 기분 좋은 우월감을 진영에게 준다.
“진영아, 오랜만이다. 나 상우야.”
“어? 상우야. 진짜 별일이네. 웬일이냐. 와이프랑 애는 잘 있고?”
“잘 있지. 다름이 아니라, 우리 은영이가 너 다니는 학교에 지원을 했는데 떨어진 것 같아서... 어떻게 좀 안 되겠냐?”
“우리 학교에 지원했다고? 미리 말을 하지. 그럼 내가 손을 써봤을 수도 있는데.”
“그땐 경황이 없어서... 일단 합격하면 말하려고 했지.”
“하긴 그랬겠지. 근데 내가 무슨 힘이 있냐.”
“진영아. 부탁 좀 할게.”
“응. 일단은 알았어.”
전화하는 내내 상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상우는 일 때문에 와이프와 미국에 당분간 가서 지내야 한다고 했다. 고등학생이 되는 딸이 도무지 외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싶어 하지를 않아 친척들에게 잠시 맡아 달라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방법을 찾다 보니 기숙학교인 부산의 모교에 지원했는데 탈락, 모교에서 교사로 일하는 진영의 전화번호를 물어물어 부탁들 한다는 것이었다.
전화를 끊고 진영은 무척 오랜만에 20여 년 전 부산을 떠올린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그들의 모교. 외국어를 전문으로 하던 학교에서 둘은 3년 동안 같은 반이었다. 학교의 특성상 배우는 외국어로 과가 나뉘어 있었고, 같은 과별로 학급이 정해졌다. 둘은 프랑스어를 전공으로 했고, 졸업하던 해 겨울까지 함께 했다. ‘몸은 떨어지지만 우리 프랑스어과는 영원하자.’
술자리에서 저마다 잔을 부딪히며 지키지도 못할 말들을 남발했던 그 겨울 냄새가 코 끝에 닿을 듯했다.
진영은 아까부터 왼손으로 빙빙 돌리고만 있던 담배를 입에 물었다. ‘탈칵’ 컴컴한 주차장 구석에서 진영의 지포 라이터 부싯돌이 부딪혔고 불꽃이 일었다. 바스락거리며 타는 담배를 한 모금 크게 빨아들이고는 지홍에게 문자를 보낸다. 최대한 친절하게, 상대에게 여지를 주되 확신을 주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메시지는 써졌다 지워졌다를 수차례 반복한다. 소리 내어 읽어보기를 여러 번, 최대한 마음에 들 때까지 문장을 고치다 전송 버튼을 누른다.
“그래, 내가 어떻게든 은영이 우리 학교 다닐 수 있게 노력은 해볼게. 혹시 안되면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지 뭐...”
올해도 담배를 끊기는 글렀군, 진영은 집으로 들어가는 대신에 또 하나의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인생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 새로운 카드를 들이밀었고, 진영은 기꺼이 카드를 손에 쥐었다. 우선 내일 당장 학교의 입학 담당 부장에게 전화를 하리라 생각하고 다시 처갓집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