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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인 Jan 05. 2025

사회초년생, 사수가 없다면?

행운 발굴하기

내가 서울에 와서 지금까지 다닌 직장에서 나는 기업 내 1인 디자이너였다. 마냥 어렸던 1년 차 때는 너무 자랑스러웠다. 잘한다 잘한다 소리만 들었던 대학교를 갓 졸업한 24살 사회초년생이 1인 디자이너를 맡았다는 것이 마치 대학생활에 대한 트로피를 받은 것과 느낌이었다.


정말 어린 생각이었지. 2년 차가 넘어갈 때쯤 느꼈다. '이 회사는 내가 만드는 대로 다 좋다고만 하는구나.'

나는 디자인을 못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예쁘게 꾸미기"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나의 미미한 성장률을 보았고,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 사수


이런 생각이 들 때쯤 첫 번째 사수를 만나게 되었다. 내 마음속 사수이다. 팀장님도 아니고 주임님도 과장님도 아닌, 거래처 인쇄업체 대표님이었다. 대표님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싶어 하셨다. 그리고 가르쳐 주는 것을 좋아하셨다.


나에게는 그 회사가 디자인 실무를 배울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매번 발주를 할 때마다 대표님께 전화해서 30분씩 떠들었다. 종이의 종류부터 발주 방법, 인쇄기법과 시공 과정까지 세세하게 물어보았다.


한 가지에 대해 정확히 알려면 원리부터 발전과정까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대표님은 자연스레 현장에서 습득하셨던 것들을 스토리텔링을 해주시며 이해가 쉽게 말씀해 주셨다. 본인의 젊은 시절을 함께했던 과정이기에 그러실 수 있었을까.


우리 아빠와 나이가 비슷한 대표님은 나와 나이가 비슷한 따님을 가진 아버지셨고, 나를 딸을 보는 아빠처럼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이를 보듯이 따스한 말투로 가르쳐주시고 따끔한 말로 혼내주셨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으며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시는 대표님께 나는 멋진 사람으로 보답하고 싶어 열심히 공부하였다.


디자인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팀원들보다 대표님이 나에겐 정말 큰 사수셨다. 혼자 서울살이를 하는 나에겐 정말 든든한 뒷배가 돼주셨다. 지금도 나는 가끔 전화를 드리며 새로운 것들을 배우곤 한다.



두 번째 사수


두 번째 사수는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만나게 되었다. 팀의 리더시다. 나에겐 너무 높고 먼 분이라 다가가지 못했는데, 어쩌다 짝꿍이 되었다. 디자이너들은 본능적으로 모니터를 남에게 보여주는 것을 싫어한다. 나 또한 그렇다. 하지만 내 모니터는 만인의 모니터였다. 구경하는 사람도 많고 중요한 업무에 있어서는 내 뒤에 세 분 정도 서서 나를 조종하신다.


처음에는 굉장한 부담감을 느꼈다. 하지만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지. 남에게 보여주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더 보여주려고 했다. 단점은 부담이지만 장점은 즉각적인 피드백이 가능했기 때문. 쓸데없는 메신저나 메일을 주고받지 않아도 되었다.


리더님은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으셨다. 내가 속해있는 팀이 디자인 팀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또 1인 디자이너이다. 하지만 매서운 눈초리와 감각적인 센스로 내 디자인을 피드백해 주신다. 내가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를 주시는가 하면, 어느 방향으로 수정하면 좋을지에 대해서 자주 의견을 주신다. 정말 신기한 건, 피드백대로 수정하면 정말 좋은 결과물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리더님과 나는 서로 탁구를 치듯이 핑퐁핑퐁 아이디어 회의를 하였다. 툭툭 던지듯이 서로 주고받던 아이디어들은 한데 모여 하나의 포스터가 되고, 베리에이션이 되었다. 거칠고 서툰 내 디자인은 그분의 하이퀄리티 피드백을 통해 다듬어지고, 오랜 세월을 보내신 그분의 시각으로 조금 더 완성도 있게 정리되었다. 나 혼자 만든 시안은 멋진 외출을 위한 화려한 패션이라면, 그분의 피드백은 덜어낼 건 덜어내고 교체할 건 교체하는, 어느 정도 정제하여 TPO를 갖춘 패션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피드백을 찰떡같이 수용하기 위해 디자인 공부를 더 열심히 하였다. 보통 사람들은 "어떤 느낌이 나게 수정하면 좋을 것 같아." 같이 말한다. 전문가-전문가끼리의 소통이 아닌 비전문가-전문가끼리의 소통을 이해하려면, 나부터가 모든 디자인 개념을 쉬운 말로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비전문가와 소통할 수 있도록 디자인을 새로 개념화를 하고 설명하는 방법을 생각했다.


피드백을 그대로 구현하기 위한 그래픽 기술도 표현 방식도 열심히 공부하였다. 첫 번째 사수 대표님이 말씀해 주신 것들을 가지고 더 연구하다 보니 회사에서 신뢰도 쌓았다. 정말 엄청난 것이다.




나는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래로 사수가 없어왔다고 생각하여 남들에게 주눅이 들거나, 필사적인 몸부림처럼 혼자 외로이 발전하려는 사투를 벌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니 나에겐 아주 소중하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을 피부로 와닿게 해 주신 두 분의 사수가 있었고, 그 존재를 이제 알게 되었다.


인생은 가르쳐주는 것을 배워가는 게 아니라, 배울 부분을 찾아내 가는 것 같다.

가만히 있지 않고 발굴해 내야 하는 것이다. 정말 내가 배울 것이 없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무조건 누구에게나 배울 점은 있다. 그 부분을 놓치지 않고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인생의 조력자를 만들어내는 방법인 것 같다. 행운과 행복은 기다리지 않고 찾아내는 것이 맞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든다.

행운 발굴하기 - 지인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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