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마음속, 그 위에 핀 꽃

- <미드소마>를 보고 난 후,

by 유진
사진 출처: 구글


고어 영화로 잘 알려진 ”미드소마“는 표면적으로는 잔인하고 불쾌한 장면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단순한 공포 그 이상의 것이 숨어 있다.


이 영화는 무너진 마음에 파고드는 악의 방식에 대해 섬뜩할 만큼 섬세하게 고찰한다.


영화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C.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가 떠올랐다.

책 속에서의 악은 우리가 흔히 아는 무서운 괴물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조용하고 친절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인간의 마음을 달래며 허문다.

마치 영화 속 호르가 마을의 공동체처럼 말이다.


주인공 대니는 가족을 잃고, 연인과의 관계에서도 외면당하며 마음 깊숙이 무너진 상태였다. 그런 그녀에게 햇살 가득한 들판 너머에서 따뜻하게 웃는 얼굴들이 다가온다.


겉보기엔 그들은 평화롭고 안전해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그들은 정서적으로 부서진 사람들을 흡수해,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다시 조립하는 집단이었다.
대니는 그 사실을, 처음에는 몰랐을 것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대니는 특별해서 선택된 것이 아니라, 단지 약했기 때문에 선택된 게 아닐까?


악의 방식은 늘 교묘하고 조용하다.
고통을 함께 느끼는 척하고, 의식이라는 이름으로 경계를 허물며, 낯섦과 이질감을 차츰 지워나간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점점 ‘이해받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든다.


이 영화에서 가장 섬뜩했던 점은,
그들이 너무 익숙한 모습으로, 너무 친절하게 다가왔다는 것이었다.

분명히 공포는 프레임 안에 있었지만,
진짜 공포는 그 바깥에서 조용히 스며들고 있었다.


관객이 느꼈던 불편함은 어쩌면, 우리 일상 속에서도 마주칠 법한 선한 얼굴을 한 악에 대한 본능적인 경계심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대니가 호르가에 흡수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연인 크리스찬이 다른 여성과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목격한 후였다.

그 순간 대니는 완전히 무너졌고, 호르가의 사람들은 거울처럼 그녀의 고통에 함께 울며 공감하는 모습을 보인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정서적 기반이 무너졌을 땐, 설령 그것이 건강하지 않더라도 일관된 감정과 안정감을 제공하는 존재에 쉽게 의존하게 된다.


그 대상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지라도 의심보다 안정감을 택하는 것이 사람이기에.


호르가는 그 틈을 정확히 파고든다.


"나는 널 이해해."
"네가 느낀 고통을 함께 느끼고 있어."
"우리는 너를 온전히 받아들일게."


이 말들은 정서적으로 고립된 사람에게는 독처럼 달콤하다.

그리고 대니는 그 유혹에 끌려,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안정을 택한 것이다.


결국, 그녀는 화면 밖 관객을 향해 미소를 짓는다.
물론 그 웃음이 구원이었는지, 파멸이었는지는
대니 자신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며 문득, 과거 내가 좋지 않은 관계에 매달리며 애써 버텼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나도 대니였고, 또 언젠가는 다시 대니가 될 수 있기에,
이 영화는 단순한 고어물이 아닌 내 감정과 기억을 꺼내보는 고백서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위로와 조종은 때로 같은 얼굴을 하고 있기에 마음이 무너진 순간엔 구분이 어렵다.


가만 생각해 보면, 진짜 무서운 건 피나 죽음이 아닌,

오히려 내가 가장 약할 때, 꽃과 햇빛 가득한 들판에서 다정히 웃으며 다가온 손길이었던 것 같다.


그렇기에 우리는 악은 무섭게만 다가오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어야 하며, 내면이 무너지기 전에 내 마음이 다정한 손길에 무방비하게 열려있는 게 아닌지 스스로 묻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마음은 지금 어떠한가?


작가의 이전글'모성', 그 숭고함 뒤에 숨겨진 폭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