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기억의 사랑 - 오래된 책들의 메아리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남는 마음이 있다.

by 유진
tempImagekFuFWX.heic 출처: 구글


시간이 지나면 사랑도 흐려질 거라고

기억은 결국 마모되어 사라질 거라고

우리는 종종 너무 쉽게 말한다.


마치 시간이라는 것이 모든 감정을 정리해 주는

성실한 청소부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어떤 사랑은 그렇지 않다.


끝났음에도 끝나지 않고,

말해지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 또렷해지는 감정들이 있다.


지나간 선택보다,

그때 하지 못했던 말들이

훨씬 오래 마음에 남아

현재의 나를 건드리는 순간들이 있다.


사랑의 잔향을 따라가는 이 책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지만 그 경계는 생각보다 명확하지 않다.


오래된 책 속에 잠들어 있던 문장들은 현재를 사는 인물의 손에 의해 다시 읽히고,

그 순간 과거는 기록이 아니라 사건이 된다.


벨과 헤미의 사랑은 이미 끝난 사랑이다.


돌아갈 수 없고, 되돌릴 수도 없다.


그럼에도 그들의 선택과 침묵은 책이라는 형태로 남아

다른 시간, 다른 삶을 사는 누군가에게 도착한다.


그 사랑은 더 이상 두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읽는 이의 마음속에서 다시 해석되고, 다시 판단된다.

‘읽기’라는 행위가 단순한 감상이 아닌 참여에 가깝다는 점에서 말이다.


독자는 이야기를 따라가며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동시에

자신의 가치관과 윤리를 호출당한다.


무엇이 옳았는지,

어디에서 용기를 냈어야 했는지,

그리고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를 끊임없이 되묻게 된다.



“내 양심을 똑바로 겨냥해 쏜 화살을 읽는 동안 당신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이다.”


어떤 문장들은 위로하지 않고, 정확히 겨눈다.

그리고 그 화살은 과거에서 출발했지만 현재의 마음 한가운데에 꽂힌다.


이 책이 말하는 시간과 기억의 사랑은 아름답기만 한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미완의 감정이고,

끝내 정리되지 못한 선택의 흔적이며,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책임에 가깝다.


시간은 흘렀지만, 기억은 아직 현재형으로 살아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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