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남는 마음이 있다.
"네 사랑이 무사하기를.
내 사랑도 무사하니까.
세상의 모든 사랑이 무사하기를."
시간은 모든 것을 옅게 만든다고들 말한다.
상처도, 사랑도, 기억도 결국엔 흐려져 사라진다고.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나는 그 말이 완전히 옳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시간은 많은 것을 지나가게 하지만,
감정까지 완전히 없애지는 못한다.
이 소설의 사랑은 늘 ‘지금’이 아니라
'이미 지나간 시간’ 위에 놓여 있다.
편지는 도착하는 순간부터 과거가 되고,
말로 하지 못한 감정은 사서함 안에서 오래 잠들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감정들은 죽지 않는다.
다만 기억이라는 형태로 살아남는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감정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사랑은 끝나도, 관계는 멀어져도,
그때 느꼈던 온기와 망설임, 두려움과 설렘까지
모두 기억 속 어딘가에 남아 있다.
시간은 그것을 지워버리기보다는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보관할 뿐이다.
나 역시도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던 감정들이나,
다시는 꺼내지 않을 줄 알았던 이름들,
그 시절의 내가 왜 그렇게 말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후회까지 생각났다.
마치 내 사서함도 함께 열어버린 듯이 말이다.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사랑이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랑은 더 이상 현재형이 아닐 뿐,
과거형으로서 충분히 의미를 가진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서야 그 감정이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얼마나 조심스러웠는지를 알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더욱더 책 속의 사랑이 따뜻하게 남았다.
도착하지 못한 편지처럼,
끝내 닿지 못한 마음처럼,
사랑 자체는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실패조차도 한 사람의 삶에 깊게 남는다.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랑은 반드시 함께 있어야만 남는 것이 아니라고.
함께하지 못했어도, 전하지 못했어도,
기억 속에 남아 있다면 그 역시 사랑의 한 형태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앞으로도 시간이 지나면 모든 감정이 사라진다고는 믿지 못할 것 같다.
다만, 그 감정이 어떤 이름으로 남느냐가 달라질 뿐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은 그렇게 시간과 기억 사이에서 조용히,
오래, 남아 있는 것이니까.
"많은 것들이 시대의 뒷골목으로 사라져 가지만 가끔은, 무엇인가 간절했던 결핍의 시절이 그립습니다. 결핍은 나를 목마르게 하고 끊임없이 찾아 헤매게 만들지만, 그건 결코 불행이 아니었습니다. 희망에 가까웠지요. 제가 바라고 꿈꾸는 어떤 결핍이 아직도 남아있길 바랍니다. 여러분께 도요. - 작가의 말 - "
책의 마지막을 덮으며
나는 내가 열어버렸던 사서함을 다시 떠올렸다.
이미 지나간 시간 속에 남아 있던
말하지 못한 마음들,
간절했던 결핍들.
그것들이 아직도 나를 목마르게 한다면,
아마 나는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