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양념게장 레시피도 안 알려주고 떠났다 외전
창밖에는 곧 눈이 내릴 것 같이 구름 낀 하늘이었다. 기말고사를 앞둔 날이었기에 고민이 많았지만, 기말고사가 끝나면 방학 동안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뜬 생각에도 잠겨있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평소대로라면 이 시간에 부모님께서는 전화를 하시지 않는다. 특히 아버지께서는 절대로 전화를 한 적이 없었다.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예감은 벗어나지 않았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기억이란 것을 인지하기 시작한때부터 느긋한 말투로 웃으며 항상 날 칭찬해 주시던, 나에게 있어서 단 한 분뿐인 고모를 더 이상 뵐 수 없게 되었다. 순간 머릿속이 흰색 캔버스가 된 것처럼 하얗게 변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난 중국에서 긴 시간의 유학 생활을 하였다. 호기심과 사춘기 시절의 가족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타국의 문화에 매료되어 순식간에 1년이 지나갔고, 대학교 진학과 혼자라는 독립의 자유에 따른 외로움과 향수에 빠질 즈음, 고모를 뵌 적이 있다. 다른 친척분들은 유학 생활이 힘들 거라고, 넌 잘할 거라고 칭찬해 주셨다. 감사했지만 사춘기 시절의 나로서는 감사함과 동시에 부담감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앞으로 잘해야만 하는 것인가? 어떻게 해야 잘할 수 있는 거지?
고모는 다른 분들과 달랐다.
“재율아 넌 참 잘해왔고, 잘하고 있어.”
다른 분들은 미래형으로 말씀해주었고, 고모만큼은 과거형과 현재진행형으로 말씀해 주셨다. 내가 해왔던 것들과,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잘 하고 있는 것임을 말이다. 그 어느 칭찬과 격려의 말보다 나에겐 필요한 말이었다. 갈팡질팡하는 사춘기시절에 나에게 있어 지금 하는 것들이 결코, 잘못되지 않았음을 말이다.
전화를 받고 바로 한국으로 갈 수 없었던 나는 북경에 있는 용화궁(雍和宮)으로 향했다. 그 사찰에서 향을 피우고 기도드렸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렸을까, 고모께서 해주신 말씀들이 그 당시 나를 지탱해 줄 수 있었기에 너무나 감사했고, 그 이상으로 가슴 아팠다. 지금은 뵐 수 없는 고모가 꼭 행복한 추억만 가지고 가시기를, 그리고 어느 곳에 계시든 더 행복한 시간을 보내시기를.
by 이재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