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와 일기
조경란 일러두기
태어나기 전부터 미용은 자신이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알았다고 했다. 그래서 가능하면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고. 청소년 시절에 미용은 이런 생각을 했다. 외로운 사람은 잠든 척하거나 살아 있는 척하지 않는다고. 그리고 중년에 다다른 무렵에는 생각이 달라졌다. 외로운 사람은 자신을 죽이거나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고. 미용과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은 건 아니었지만 재서는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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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나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 사람이었다.라고 미용은 썼다. 언젠가 아침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한 여성학 박사가 출연해 모든 사람은 빛나고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하자 방청객들이 감동한 표정으로 박수 치는 장면을 보았다. 순간적으로 미용은 이때껏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욕설을 내뱉었고, 제 소리에 놀라 후딱 주위를 돌아보곤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안심하며 전원을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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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부모는 이미 죽었다. 두 번 다 일반적인 죽음이라고 말하긴 어려웠다. 삶의 가운데가 아니라 늘 가장자리를 걷고 있다는 걸 깨달을 때 사람은 자신을 한번 돌아보게 된다. 왜 이런 사람이 되었는지, 누가 자신을 이런 사람으로 만들었는지. 미용의 몸에서 조급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이 흘러나왔다. 의사와 상관없이 늘 복종하고 순종하는 사람은 자신이 되고 싶은 사람이 아니었다. 고치려고 해도 잘되지 않았다. 중년이 되어 미용은 마음먹었다. 자기 자신을 죽이기로. 아니 자기 자신만 죽이기로. 미용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 사이가 멀어서 다른 두 사람이 각자 흘리는 눈물처럼 보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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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이야기를 쓴 짧은 글들이 미용을 그 자리로 옮겨놓았다. 그동안 출력한 종이의 무게를 가늠하며 재서는 이 책에 나오는 내용은 모두 사실이지만 특정 인물의 이름과 지명은 모두 지은이가 지어냈다는 말은 본문이 아니라 매 앞의 '일러두기'에 써두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일러두기라는 게 있었네요.
미용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맡은 일을 하느라 재서는 대학사에서 수많은 책의 앞 장들을 넘겨보았다. 그저 감으로 진실해 보이는 책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책도 있었지만 자신 같은 평범한 독자에게는 일러두기가 상세한 책일수록 친절하게 느껴졌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그런 게 있으면 좋겠네요.
왜요?
그러면 미리 이해를 구할 수도 있고 안내 같은 것도 할 수 있게 될 테니까요.
다음 주 월요일에는 새로운 회사로 출근한다. 어제는 언니와 데이트했고, 그제는 집에서 누워만 있었다. 오늘은 9시에 눈이 떠졌지만 계속 누워있다 12시에 일어나서 밥 먹고 설거지하고 느지막이 집 근처 스타벅스로 출근했다. 요즘에 매일 아침에 일어난 시각을 공유하는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스타벅스에서 요즘 가장 제일 많이 꽂힌 샤케라또 비얀코 오버 아이스를 스타벅스 어플로 주문했다. 오늘자 매일경제 신문을 읽고 올해 초 소설 수업 때 읽어야 했던 최미래 항아리를 머리에 쓴 여인이 들어있는 책을 대상 수상작인 조경란의 일러두기를 읽었다.
저번에 쇼코의 미소를 읽고 소설을 한 4 문장 정도를 쓸 때까지만 해도 재밌었는데 또 한계에 부딪히고 내가 과연 쓸 수 있을까? 의심하기도 했지만 소설을 쓰고 싶다는 마음을 먹은 것만으로도 대단하고 의심하지 말고 믿고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러두기를 읽으면서 외숙모와 고모가 생각났다. 누워만 있을 뻔했는데 출근한 내 자신 칭찬한다. 나를 믿고 소설을 다시 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