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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헌 Oct 09. 2015

다시 신발을 꺼내 신고

[SCIOLIST대중음악리뷰] 에픽하이, 신발장

상처의 완전한 극복은 세 가지로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용서, 믿음, 결심. 


틀 짜기를 좋아하는 습성의 발로에 의해 시간 순서로 대응시킬 수도 있겠다. 과거의 순간순간에 대한 각각의 용서, 현재의 가해자/세계 전체에 대해 새로이 갖는 기대 혹은 그럼에도 다시 갖는 믿음(악성을 알면서도, 믿어’줌’), 앞으로 다시 세계를 받아들여보겠다는 결심.


타블로 역시 이런 것들을 지나왔을까 상상한다. 솔로앨범 [열꽃] 때만 해도 아직 용서,만, 그것도 절반쯤을, 한 느낌이었다. 대부분의 가사는 한 감정에 매몰되어 있었고( 자연스러운 일이며, 앨범이 하나의 무언가로 수렴하는 것도 멋진 일이지만.) "출처"처럼 그 감정에 대한 예외인 곡은 다소 작위적인 느낌이 강했다. 예외를 만들기 위한 예외 같은 느낌. "에어백"에는 그 곡만의 절실함이 제대로 담겼고 완성도도 높았으나 뭔가 폭발하는 부분이 없었다. 클라이막스를 내지르기엔 아직 한 발을 뒤에 두고 경계하는 느낌. 


그와 달리 [신발장]은 용서와 믿음과 결심이 모두 이루어진 후에 만들어진 앨범이라고 생각된다. 우선 신선하다. "막을 올리며"나 "LIFE IS GOOD"의 멜로디는 특히 그렇다. 단순하지 않고 한 번의 트위스트가 있으면서도 흩어짐 없이 귀에 꽂혀 어떻게 그런 모순적인 특성들이 공존할 수 있는지 신비롭다. 


"또 싸워"는 윤하의 보컬이 정말 깊다.이건 거의 윤하 본인 신곡에서보다 더 아름다운 목소리다. 본래 윤하가 가지고 있는 힘 있는 가창력의 단순한 활용을 넘어, 특별히 정성을 들여 부른 듯한 느낌을 준다. 윤하 파트가 더 길었으면 싶은 아쉬움이 들 정도다.


"Amor Fati"는, 제목만 들었을 때는 곡이 제목에 가려버리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곡을 들어보니 그런 걱정은 기우였다. 어둠 속에서 부르짓는 운명애라니, 김종완이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주제다. 말이 필요 없다. 가사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고, 절규와 한숨으로 변주되며 그때마다 감정이 완벽하게 실리는 김종완의 "he doesn't love me" 부분은 절실함이 진실되게 담긴 만큼 쉽게 각인되어, 노래가 끝난 후에도 오래도록 남는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예전 타블로 보컬 목소리 중에 투명한 느낌을 주는 목소리도 있는데 신발장의 곡들은 그 목소리를 쓴 곡이 없는 것. 특히 "스포일러” 보컬 직접 해주어서 너무 좋은데 조금만 더 맑게 불렀어도 좋았을 듯하다.


타블로는 라디오에서 이 곡들이 누군가에게 “필요한 곡”이 되길 바란다고 했는데 아, 몹시도 필요하다. 상처가 무조건 사람을 깊게 만든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대부분의 충격은 파괴만을 낳는 것이 당연하다. 그럼에도 타블로는 이긴 것이 틀림 없다. 다시 한 번 세상을 믿는 에픽하이다.


SCIOLIST, 2014.10.21


에픽하이, "신발장"
2014.10.21
YG Entertai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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