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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추억을 안겨준 음악

이승철 - My Love (나의 그리운 외숙모에게)

2013년 가을 즈음 나온 노래로 알고 있다. 뜬금 없는 말이지만 투개월의 넘버원도 같은 시점에 나왔었다. 기숙사 지하 1층 휴게실에서 레포트를 쓸 때 대학 동기와 이 노래를 들었었다.


나와 그 애는 넘버원 가사 중에서 '짠하고 나타날게' 부분에서 진짜 '짠'하고 나타나는 시늉을 하며 킬킬거리곤 했었다. My Love도 마찬가지. 매우 좋은 노래임에는 틀림없지만 슈스케에서 이승철 님의 '어서 와, 이건 처음이지?'라는 대사의 표정이 짤로 희화화되어 퍼졌던지라 당시에는 이승철님 얼굴만 봐도 우리는 웃음이 나왔었다.


나름대로 앞만 보고 달려갔던 예전의 추억(당시에는 지옥같았지만)을 회상하고픈 마음에 이 노래를 틀었다. 노래를 들으면서 유튜브 댓글도 같이 보는 습관이 있는데 이번에는 괜히 그런 것 같다. 한 댓글을 본 순간 내 눈이 뿌옇게 흐려지고야 말았다.


베스트 댓글을 몇 개 공개하고 나서 내 감정을 동요시킨 댓글을 공개하고자 한다.


참어렵네: 노래라는게 참 좋은거 같습니다 어떤 노래를 들으면 어떤 추억이 떠오르고 또 어떤 노래를 들으면 또 다른 추억이 생각나고

→ 나도 이 노래가 나온 시점에 대한 추억으로 이 노래를 듣는 것이니 상당히 공감간다. 베스트 댓글 1위.


sungheex1: 저는 원래 이승철의 노래를 전혀/아예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매니아성 강한 극성팬들이 키운 뮤지션이라는 생각이 강했죠. 하지만, 가끔씩 핵폭탄급으로 히트시키는 그의 노래는 정말 무한반복재생을 전혀 지루하지 않게끔 합니다. 이 노래가 대표적인거 같습니다. 단 한곡을 무한루프로 연속재생해도 지루한 느낌이 전혀 없습니다. 단지, 곡의 리듬만으로 가능한건 아니라고 봅니다. 그의 창법은 상당히 독특하고, 감정과 음처리를 정말 자연스럽게 융합시키는 가수인거 같습니다. 대단한 뮤지션입니다.

→ 거부감 없는 목소리와 히트곡이 많아서 이승철 님이야말로 대중적인 뮤지션이라 생각했었는데 아닌가보다. 나는 음악의 '음'도 모르는 문외한이지만 이 댓글을 보니 이승철 님의 가창력이 더 대단해 보인다. 이런 감상평을 남기는 저 분은 음악에 조예가 깊은 분 같기도 하다. 굉장히 고퀄리티의 댓글 같다.


Ma Jh: 내가 살빼며 자전거 탈때 듣던 노래 지금은 족발이랑 한잔하며 듣는다 내살들아 ㅋㅋ

→ 아이고야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건 그저 웃음만 나온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해학적인 분이시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팽듈 공듀: 이노래 들으니 뭔가...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보고싶구...짠 하다.....ㅜㅜ

이 댓글의 답변으로 '나도 그렇다'류의 리플이 달렸다. 점점 한 사람이 떠오를락 말락 하다가


이희상: 이노래를들으면 돌아가신 장인어른이생각나게한다 무서웠지만  암으로고생하시고  야윈모습를보고 꼬챙이같던분이 왜이렇게 짠한지이노래를들으면 장인어른이보고파진다

이 댓글을 보고 코 끝이 시큰해짐과 동시에 방구석에서 숨죽여 울었다. 가슴 속에 묻어둔 한 사람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제는 너무나 오래돼서 얼굴도, 말투도 잊혀지려고 하는 분. 지금의 우리 엄마는 당신이 돌아가신 당시의 시점보다 나이가 더 많아졌어요.


그 분은 나의 큰외숙모님이다. 풀어쓴다면 우리 엄마의 첫째 오빠의 배우자라고 말할 수 있겠다. 10년 전 마흔 넷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대학병원 중환자실에서 돌아가셨다.




사랑해 그말은 무엇보다 아픈말
숨죽여서 하는말 이젠 하기 힘든말


외숙모는 1964년생이셨다. 키는 154cm 정도에 흰 피부를 가지셨고 쌍꺼풀진 눈에 눈꼬리는 내려갔었다. 그리고 항상 짧은 파마머리를 유지하셨다. 말씀을 하시는 도중에 인상을 찡그리며 입을 다물다가 다시 말씀하시는 습관이 있으셨다. 고등학교까지 졸업하신 것으로 알고 있고, 형제자매가 굉장히 많으셨다. 외숙모의 자매들은 호주 여행을 갈 정도로 잘 살았다. (호주에서 사 온 기념품인 성인용 잠옷을 9살짜리 꼬마였던 내가 호기심에 입어본 기억이 난다) 하지만 우리 외숙모는 그분들과는 정 반대였다. 찢어지게 가난한 외삼촌과 결혼해서 고생을 굉장히 많이 하셨다. 공무원과 선을 봤었다고도 하는데 '내가 태어나지 않아도 좋으니 차라리 그 사람이랑 결혼하지'라도 말했던 외사촌언니의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내 외숙모 하지 않아도 좋으니, 나와 인연을 맺지 않아도 좋으니 제발 공무원이랑 결혼하라고. 외삼촌은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들 정도로 근로 의지가 없는 사람이였다. 지인과 어울려 술 마시기를 즐겼다. 할머니 식당의 단골 손님인 외국인 노동자 아메다(이 아저씨 이름 아직도 기억이 난다.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결국 본인의 나라로 갔다고 한다)를 다짜고짜 가정집에 데리고 오기도 했었다. 솔직히 말해서 집 나가도 할 말 없는 상황이였다. 하지만 우리 외숙모는 긍정적인 성품을 지니셨다. 이런 상황인데도 인상 찡그림 하나 없이 항상 웃으면서 지내셨다.


외숙모의 기일날 나는 하늘이 무진장 원망스러웠다. 그러다가 이내 '너무 착한 분이라 하늘이 일찍 데리고 가셨나'라는 생각을 했다. 복잡하고 더러운 일 천지인 이 세상에서 살기에는 너무 깨끗한 분이라서 일찍 가셨을까.. 라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다.


Oh 햇살이 밝은 아침보다 밤의 달빛이 어울려요
이별의 그 입맞춤 잠시 접어둔채
이대로 이렇게 힘껏 안아줄께 널
그리고 말할께


아홉살 때 갑작스런 엄마의 투병생활로 우리 가족은 뿔뿔히 흩어졌다. 엄마는 광역시 소재의 대학병원에 입원하셨고 아빠는 전세 들어 살던 옛날 집에서 일하며 혼자 지내셨다. 동생은 논공단지에서 식당을 하시는 외할머니 댁에서 유치원을 다녔고 나는 먼 친척 댁에서 반년간 지내다가 2학년 2학기때부터는 큰외숙모 댁으로 갔다.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큰외숙모와의 인연이 시작된 것 같다.


우리 외숙모는 정말 치열하게 살았다. 새벽엔 우유배달, 낮에는 할머니 식당 일 돕기, 밤에는 우유배달 수금을 하러 다니셨다. 이것만으로도 벅찬데 4명의 아이들까지 동시에 키워냈다. 당시에 외숙모의 친자식인 외사촌언니는 초6이였고 외사촌오빠는 초3이였다. 거기다가 조카라고 온 초2인 나도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공무원인 작은외숙모는 일을 하기 위해 갓 태어난 사촌동생을 큰외숙모에게 맡겼다. 요즘 커뮤니티 사이트에 이 글을 올리면 죄다 이혼하라는 글만 나왔을 것 같다. 이처럼 우리 외숙모는 쉬는 날도 없이 육체노동과 가사노동을 하셨다. 그런 상황인데도 나에게 화풀이 한번 한 적 없으셨다. 친부모도 자식을 학대하고, 죽이는 세상인데 우리 외숙모는 정말이지 보살이였다.




내가 봐도 나는 특이한 성격이였다. 동생이 '언니, 나 보고 싶지?'라고 전화를 걸어와도 '뭐 그럭저럭'이라고 말해서 두고두고 회자되기도 했다. 만화책에 나온 말이 굉장히 웃겨서 따라했던건데 동생을 보고 싶지 않아한다는 이상한 오해를 받기도 했다. 먼 친척분 댁에 살 때는 말 안듣는다는 잔소리를 하루에 수백번은 들었었다. 나름 눈치 보면서 살았는데 왜 그런 말을 듣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왜 내편을 들어주는 엄마아빠가 없을까?' 서러움에 복받쳐 구석에 숨어서 참 많이 울었다. 하지만 큰외숙모는 나에게 그런 말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나를 예뻐하셨다. 정말 가끔 '이눔의 가시내야!'라고 혼내시곤 하셨는데 그 말투에서조차 애정이 느껴졌다. 과거에 엄마에게 혼났을 적에는 빗자루나 파리채로 체벌당하기도 했었는데(나는 엄마에게 맞는 순간에도 '파리 죽인 더러운 물건으로 나를 때리다니..'라고 생각한 특이한 아이였다) 외숙모에게 맞은 기억은 단 한번도 없었다.


우리 외숙모는 밤의 달빛이 어울리는 분이셨다. 주로 밤에 우유 배달 수금을 하러 가셨다. 그리고 그 순간에는 항상 나와 함께였다. 외사촌오빠가 '나도 데려가. 왜 쟤만 데려가는데? 엄마는 현이만 좋아하고.'라며 투덜거려도 외숙모는 '그래 난 현이가 제일 좋아.'라고 당당하게 말씀하시고는 나를 오토바이에 태우셨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안전모도 쓰지 않았다. 상당히 간이 큰 짓이였지만 오토바이는 굉장히 스릴있었다. 바람이 뺨을 스치는 시원함과 아스팔트 길을 시원히 달리는 느낌이 낯선 곳의 생활을 잊게 만들었다. 수금을 하다 보면 예쁘다며 돈 천원씩 얹어주시는 분도 있었다. 그것도 좋지만 나는 누군가가 나보고 예쁘다고 말해주는 것 자체가 좋았다. 나는 남들이 '엄마'를 부를 때 나는 외숙모부터 찾을수밖에 없었던 사랑과 관심이 고팠던 어린아이였다.




나는 무언가를 한번 좋아하면 끝을 보는 성격인지라 초등학교 1학년 때는 식물도감 책을 너덜너덜해질때까지 읽었다. 덕분에 식물에 관심이 굉장히 많았는데 우리 외숙모는 내가 사달라는 식물은 무조건 사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애가 물건 사달라고 조른다'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으셔서 그저 감사한 마음 뿐이다. 선인장도 사주셨고 로즈마리도 사주셨다. 로즈마리는 물주기에 실패해서 여러 번 죽였지만 그래도 두세번은 더 사주셨다. 시장에서 히야신스도 사주셨다. 당시에 같은 반 친구가 뇌진탕으로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났는데 우연의 일치였는지 당시에 내가 키웠던 히야신스가 하얗게 꽃피웠었다. '얘도 친구의 죽음을 슬퍼해서 하얀색으로 꽃을 피웠네.'라고 말하니 외숙모도 그렇다며 공감해주셨던 기억이 난다.


외숙모는 엄마 대신에 나를 목욕탕에 데려가기도 하셨다. 유통기한 지난 우유나 요플레로 피부 마사지도 해 주셨다. 학원에서 소풍 가는 날에는 기 죽지 말라고 유부초밥을 싸주시기도 했다. 키우는 아이들이 많아 힘들 법도 한데 우리 외숙모는 맛있는 간식도 많이 만들어주셨다. 손잡고 동네 마트에 가서 납작만두를 사서 구워주시기도 했고 떡볶이와 김밥을 뚝딱 만들어주시기도 했다. 짜파게티도 굉장히 맛있게 끓여주셨다. 물이 흥건했던 냄비 뚜껑을 '짠'이라는 리액션을 취하며 열었는데 맛있게 국물이 졸여있는 장면은 어린 내 눈엔 경이롭기까지 했다. 외숙모를 따라한답시고 집에 아무도 없는 날에 혼자 만들었는데 국물 조절에 실패했던 기억이 난다. 학원을 마치고 돌아온 외사촌오빠에게 국물 좀 먹어달라고 말했지만 거절당한 것도 생각난다.




나는 유난히 잔병치레가 심했다. 감기에 자주 걸렸는데 큰외숙모는 나를 극진히 간호하셨다. 눈이 나빠서 안경을 써야 했는데 생애 첫 안경도 큰외숙모와 함께 맞췄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소풍가기 전날 두드러기가 심하게 나서 소풍을 가지 못했던 날이 있었다. 외숙모에게 소풍 가고 싶다며 울고불고 항의했지만 단호하셨다. 그 날 하루종일 외숙모와 말도 안 섞고 방구석에 누워 있었던 기억만 난다. 그럴 시간에 외숙모와 한마디라도 더 할걸 그저 후회스럽기만 하다. 그리고 모기에 자주 물리는 나를 위해 약국에서 물린디를 사서 집에 가는 길에 우연히 사람이 죽었다는 현수막을 함께 봤었는데 외숙모께서 굉장히 안타까워하셨던 기억이 난다.


외숙모는 할머니의 식당에서 일하며 출퇴근하셨다. 그래서 나도 할머니 식당에 자주 들렸다. 하루종일 할머니 댁에서 있다가 퇴근할때쯤, 외숙모는 동네 사는 아이가 차에 치여 죽음을 당했다는 얘기를 하면서 상당히 안타까워하셨다. 모르는 사람이지만 이웃이니 안타까운 마음에 돈을 조금 냈다고 말씀하셨다.


어느 날 아무도 없는 방에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외숙모에게 이게 무엇이냐고 하니 아버지의 제삿상이라고 했다. 무서웠지만 나도 경건하게 기도했던 기억이 난다. 이처럼 나는 외숙모와 누군가의 죽음과 연관된 기억이 많았다.


외숙모의 어머님을 한 번 뵌 적이 있었다. 16년 전에도 연세가 매우 많으셨는데 시골 집에서 혼자 생활하셨다. 손수 만든 감자칩을 나에게 주기도 하셨다. 아직도 살아계시다고 들었는데 당신의 딸이 먼저 이승을 떠나서 상당히 슬퍼하셨을 것 같다.


나는 외숙모와 함께한 밀레니엄 해의 크리스마스 이브를 잊지 못한다. 거리에 수놓여진 네온사인을 가로지르며 오토바이를 타고 길을 달리는 순간만큼은 내가 크리스마스 이브의 주인공이였다. 날씨는 쌀쌀했지만 마음만큼은 따뜻했다. 가족들과 뿔뿔히 흩어져 있었지만 외숙모의 큰 사랑으로 전혀 외롭지 않았다. 큰외숙모는 엄마보다 더 엄마 같은 존재였다.


나 이렇게 너를 외치면서 My Love
넌 보지 못할 내 마지막 눈물
힘껏 안아줄께 널 그리고 보낼께
나 또한번 너를 외치면서 My Love


초등학교 3학년 부터는 큰외숙모의 품을 떠나서 다시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큰외숙모가 좋아서 주말에 자주 놀러 갔던 기억이 난다. 외숙모는 내가 올 때마다 '핸이 왔네'라며('현'을 '핸'이라고 발음하셨다) 김밥과 라볶이를 만들어주셨다. 드라마를 굉장히 좋아하셨는데 내가 오면 드라마도 뒷전이였다. 기분 좋게 웃으며 나를 반기기 바쁘셨다.


특히 대장금을 굉장히 좋아하셨다. 나보고 항상 이영애처럼 예쁘다고 말씀해주셨다. 너는 미스코리아감이라고, 좋은 대학 가면 널 좋아하는 남자들이 줄을 설거라고, 핸이는 나중에 늘씬하게 키클거라는 식의 세상에서 가장 기분 좋은 말씀은 다 해주셨다. 남들이 말하는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해 첫마디부터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내 인생에서 들은 유일한 극찬은 나를 기분 좋게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인생에서 가장 뚱뚱했을 때도 우리 외숙모는 나를 칭찬해주시기에 바빴다. 역시나 같은 레파토리. 네 살은 전부 키로 갈거라고, 나중에 진짜 늘씬해질거라고, 우리 핸이 미스코리아감이라고.. 물론 이건 대략은 맞아 떨어진 것 같다. 지금은 오히려 먹어도 살 안찐다는 말만 들으니까.


적고 보니 외숙모가 무진장 보고 싶다. 지금은 나한테 이런말 해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데. 우리 외숙모가 무진장 보고 싶은 밤이다.


넌 듣지 못할 사랑한단 내말
괜찮아 그말은 안쓰러운 거짓말
애쓰면서 웃어도 우린 그저 눈물만


중학교 삼학년 어느 날, 쉬는 시간이였다. 엄마에게 갑자기 전화가 왔다. 이 시간에 전화가 올 일 없는데, 라며 아무 생각 없이 전화를 받았다. 엄마는 굉장히 울먹이셨다.


현아.. 현아... 큰일났어... 외숙모가... 교통사고가 나서 중환자실에 누워있어... 살아나지 못할 지도 모른대....'


'큰외숙모?'


'응, 큰외숙모.'


그 말을 듣자마자 다른 사람이 나를 의식하든말든 상관없이 오열했다. 살면서 들은 가장 슬픈 말이였다. 쉬는 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렸고 수학선생님의 등장에도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선생님은 진정 좀 하라고 나를 화장실로 보냈던 기억이 난다. 그때부터 나는 하루종일 기도만 했다. 종교를 믿지 않았지만 세상에 있는 모든 신을 소환했다.


'하느님, 부처님, 마호메트님, 제발 우리 외숙모 좀 살려주세요.'

'하늘에 계신 친할머니, 우리 외숙모 좀 살려주세요. 제발요' 따위의.


주말에 하루 날을 잡아서 외숙모를 보러 대학병원 중환자실로 갔다. 우리 외숙모의 머리는 깎여 있었고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다. 눈은 퉁퉁 부어서 뜨지도 못했다. 내가 알던 외숙모의 모습이 아니라 이질적인 느낌에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손은 퉁퉁 부어서 평소의 두배로 커져 있었다. 손을 한 번 잡고는 고개를 숙일수밖에 없었다. 처참한 그 모습에 그저 눈물만 났다.


외숙모가 살아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다들 No라고 말하지만 기적은 일어날거라고, 얼른 일어나서 나에게 '핸이야'라고 부를거라고 믿었다. 마음 한켠으로는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지만 반전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지금같았으면 외숙모의 예후가 좋지 않았음을 직감적으로 느꼈을 것 같다. 외숙모에게 들어가고 있는 fluid를 보며 치료가 어떤 단계로 진행되는 지도 대략 알았을 것 같다. 그리고 마음의 준비를 했을 것이다. 돌아가시기 전에 좀 더 손을 잡아드렸을지도, 마지막 모습을 일초라도 더 보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내가 너무 어렸다.


외숙모의 죽음을 미처 준비하지도 못한 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학교와 학원을 빠지고 장례식장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울기만 했었다. 외할머니의 곡소리에 더 슬프게 울었던 기억이 난다.


평소에 할머니 댁에 방문하고 나서 집에 갈 때, 나는 마음속으로 '할머니 할아버지는 연세가 많으시니 언제 돌아가실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지막 모습을 더 보려고 노력했었다. 물론 그것도 좋지만 그 옆에서 나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던 큰외숙모 얼굴을 한번 더 볼걸. 너무도 후회스러웠다. 외숙모가 나에게 하셨던 잡채 먹으라는 말을 며칠 전에 먹었다며 성의 없게 받아친 내 자신이 미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꾸역꾸역 다 먹을걸. 그저 미련만 남는다.


Oh 햇살이 밝은 아침보다 밤의 달빛이 어울려요
이별의 그 입맞춤 잠시 접어둔채 이대로 이렇게 힘껏 안아줄께 널 그리고 말할께  
이렇게 너를 외치면서 My Love  
넌 보지 못할 내 마지막 눈물


우리 외숙모는 10년 전 봄에 정말로 밤의 달빛이 되셨다. 그리고 10년이 지나 훌쩍 큰 나는 지금 글로써 우리 외숙모를 힘껏 안아드리고 싶다. 우리 외숙모의 존재를 이 세상에 알리고 싶다. 이렇게 열심히 살다 가신 분이 있었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싶다.


그동안 이 세상에서 사느라 수고 많으셨다고. 내가 호강시켜드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죄송하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을, 우리 외숙모는 보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환생이라는 게 진짜 있다면 부잣집에서 풍족하게 사셨으면 좋겠다는 마음 뿐이다. 그리고 다시는 아프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중환자실 같은 곳에서 나를 마주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아니, 사실 괜찮지 않다. 비록 이승에는 안 계시지만 내가 당신을 이렇게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좋겠다. 어릴적부터 특이한 이름 때문에 수없이 놀림받아온 나였다. 크면 개명부터 해야겠다는 마음부터 들었는데 외숙모의 죽음 이후로부터는 그런 마음이 싹 사라졌다. '우리 외숙모는 나를 <핸이>로 기억하실 텐데 내가 어찌 바꿔?' 라는 생각 뿐이였다. 그 정도로 우리 외숙모가 그립다.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가장 힘이 되어준 그분이 너무나도 보고 싶다.



힘껏 안아줄께 널 그리고 보낼께
나 또한번 너를 외치면서 My Love
넌 듣지 못할 사랑한단 내말 My Love


외숙모, 전정남 씨, 한번도 말하지 못했는데 제가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요. 그리워해요. 보고 싶어요. 저도 인간이기 때문에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겠죠. 그 때 우리 꼭 만나요. 그래서 못다한 얘기 하면서 그렇게 행복하게 지내요. 지금은 제가 이승에 있기에 저승에 계신 당신을 이렇게 보내드립니다. 하지만 우리 나중에 꼭 만나요. 고마운 마음 평생 간직하고 당신의 존재를 잊지 않을테니 우리 나중에 웃으면서 만나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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