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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일기

171001 off

  정서가 불안한지 아침 일찍 깼다가, 잠들다가, 다시 깨어나는 게 습관이 됐다. 눈을 뜨니 오전 열한 시. 일하느라 미뤘던 '로봇 시대, 인간의 일' 독후감상문 제출을 하리라 마음먹었다. 데이 근무를 마치고 비몽사몽 한 상태로 적어서 그런지 내용이 영락없는 어린아이 낙서 수준이다. 이대로 내면 답이 없다. 머리를 쥐어짜서 겨우겨우 수정했다. 혹여나 잘못 보냈을까 이메일 주소를 두 번, 세 번, 다시 확인했다. 내 간절함이 이대로 영영 묻히는 건 억울하니까.


 상금을 받으면 무엇을 할까? 당연히 책을 살 거고 가족들과 외식을 할 거다. 남은 돈으로  기부를 해야지. 내가 좋아하는 리온파이브 덕질을 위해 돈을 남겨도 좋을 듯싶다. 6년 된 노트북도 바꿔야 한다. 노트북을 산다면 글을 쓰기 수월 할 텐데. 군대 간 외사촌 동생에게 용돈도 주고 싶다. 최전방에 갔다던데 일이 바빠서 잘 가라는 인사도 못했다.


JTBC 믹스나인에 출연 예정인 리온파이브. (참가번호 기준) 15로윤, 67민재, 76강산, 77유성, 100정현, 148태우

 이 아이는 어릴 적부터 공부를 잘해서 SKY 중 한 곳에 입학했다. 학생 때는 공부에만 전념해서 SNS가 없었다. 입시지옥에서 해방돼서 SNS 계정을 만든 건가? 반가운 마음에 친구 추가를 했다. 원하는 대학 가서 축하한다고 안부 몇 마디를 주고받다가 내가 일방적으로 친구관계를 끊었다. 나랑 절연한 외사촌이 '학생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얘가 SKY 가니 친한척하느냐'며 내 욕을 했기 때문이다.


반박할 마음조차 들지 않는다. 학벌이 좋아서 말을 걸었던 건 전혀 아니다. 그래,  내가 못났기에 그런 말이 나오는 거겠지. 내 탓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성공해서 그런 말을 안 들으면 되는 거다.


먼 친척동생의 용돈도 주고 싶다. 교복 사라고 돈 줬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했다. 후회만 커진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상금을 많이 받아야 가능하다. 아뿔싸,  오후 한 시를 훌쩍 지났다. 밥도 안 먹고 상상만 하다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마음만은 행복하다.


 엄마에게 '나 상 받을 거야!'라고 말하니 한숨을 쉰다. '엄마, 태우 서바이벌 나온대! 태우 잘되게 빌어줘.'라고 말하니 '쟤 왜 저러냐.'는 눈빛으로 쳐다보신다.  내가 좋은데 아무렴 어때.




엄마를 졸라서 도서관에 갔는데 바보처럼 도서대출증을 놔두고 왔다. 결국 엄마의 책과 <로봇 시대, 인간의 일> 반납만 했다. 도서관은 내일 아침에 다시 들리기로 했다. 엄마는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시고는 일터로 출발하셨다. 내가 빌린 책은 바로 꿈꾸는 다락방이다. 당구선수 차유람의 남편 이지성 작가의 베스트셀러다. R=vd라는 유명한 공식으로 알려져 있는 책이다.


6년 만에 다시 읽어보는데 예전과 느낌이 많이 다르다. 그때는 막연하게 '성공해야지', '취업 잘해야지' 뿐이었다면 지금은 '작가가 되고 싶다', '내가 도전하는 공모전마다 좋은 성과를 거뒀으면 좋겠다', '내가 좋아하는 태우, 리온파이브가 잘됐으면 좋겠다'는 나름 구체적인 바람이 생겼다.


9월 내내 공모전 2개를 위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도전을 멈추지 않으리.  10월 31일까지 진행하는 독후감 쓰기 대회를 위해 시내에서 책을 사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9월 중순에 찍어낸 신간이라 그런지 책이 없었다. 추석 연휴 때문에 빨라도 9월 11일에 도착한단다. 이대로 집에 돌아가기는 허무해서 베스트셀러 코너에 돌아다녔는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두 눈이 마주치는 순간 우리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우리는 10년 지기 친구에, 직장동료인 관계. 같이 카페에 가자고 하는 걸 '저녁 못 먹어서 지금 카페 가기는 좀 그래'라고 둘러대서 보냈다. 친구야, 미안. 사실 난 명견만리가 무진장 보고 싶었어.


며칠 전에 마약 처방전 사인을 받으러 응급실에 들렸다. 한산해서 할 일이 없었는지 인턴 선생님은 독서 삼매경에 빠졌다. '의사는 어떤 책을 읽을까?' 괜스레 궁금해져서 자세히 봤는데 그게 바로 명견만리였다.


문재인 대통령도 일독을 추천한다는 두 줄 평을 뒤로한 채 홀리듯이 책장을 넘겼다. 목표는 3편 전부 다 읽기였지만 현실은 '정치' 부분만 봤는데도 배가 고팠다. 다음에 읽기로 하고 후다닥 서점을 빠져나왔다.


뭘 먹지 고민하다가 맘스터치에 들려 싸이 버거 세트만 먹고ㅡ동생 것도 샀다ㅡ동생이 일하는 카페에 들렸다.


항상 주문하는 바나나 스무디를 호로록호로록 마시는데 남자 두 명이 손님으로 왔다. 구면인지 동생에게 아는 체를 했다. 동생 마시라고 단지 우유도 쥐어줬다. 그 남자는 설거지를 하는 동생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솔직히 얘가 호감상이긴 하다. 쌍꺼풀진 눈망울도 동글동글하고 선천적으로 속눈썹이 길어서 '소 눈'이다. 코도 엄마 닮아서 올망졸망 작고 입술도 도톰하니 예쁘다. 성격도 서글서글해서 낯도 안 가린다.  


 동생에게 말을 걸었다. 둘이서 어색함 없이 대화하니 남자는 나와 동생의 관계가 궁금했나 보다. 친구냐고 묻는데 '아니요. 언닌데요.' 말했다. 눈이 땡그랑 커지더니 대뜸 '그때 봤던 그 사람'이 맞냐고 한다. 저를 본 적 있느냐고 물었다. 며칠 전에 동생에게 치킨을 갖다 줬던 모습을 봤다고 한다. 안경 쓰고, 머리 질끈 묶고, 슬리퍼 질질 끌었던 상태였는데 많이 달라 보였는가 보다.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단다.


"화장한 게 나아요."

"우리 언니 화장 안 하는데요."

"아, 안경 때문인가 보다. 앞으로 안경 벗으세요."


나는 가만히 있는데 동생이 그의 말을 되받아 쳤다. 내가 왜 그 남자에게 얼굴 평가를 받아야 하는지 이유를 전혀 모르겠지만 대답하기 귀찮아서 넘겼다.


그러고는 대뜸 책을 열심히 읽고 있는 나에게

"담배 피우세요?"라고 묻는다.

"안 피는데요."

"요즘 보기 드문 여자네."


본인은 좋은 뜻으로 말했겠지만 나는 여기서 또 불쾌했다. 요즘 여자가 담배를 많이 피운다는 뜻인가? 아니, 많이 핀다고 쳐도 그게 본인한테 해를 끼치는 걸까? 그러는 본인은 말하다 말고 밖에 가서 흡연하면서. 모순적이라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괜히 대꾸했다가 동생이 일하는 카페의 단골손님이 사라질까 봐.


가끔 말을 걸어와서 상대하기는 했지만 그는 내가 책을 읽고 있는 틈을 타서 나에 대한 품평을 했다.


"코 한 것 아냐?"


나는 그 사람의 얼굴에 대해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물어오는 것에만 대답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남자는 공기 마시듯 내 얼굴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분해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몰랐다면 이 상황을 자연스레 넘겼겠지만 '페미니즘'이 네이버 실검 1위인 세상인데 내가 모를 리가 있나. 화가 났지만 현실 세계에서 어쩔 수 없이 방관자가 되었다.


이곳에서조차 내 주관을 굽히고 싶지 않아서 나만의 일기를 기록해본다. 오프를 어찌 보냈나 정리도 할 겸.

오늘의 기나긴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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