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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잡 뛰는 간호사

6/21(금)

금요일에 있었던 일을 복기해본다.


첫 출근. 옷을 어찌 입어야 할지 몰라서 운동화에 찰랑찰랑한 소재의 긴 바지, 찰랑 팔랑 반팔을 입었다. 머리를 묶고 머리띠로 옆머리를 정리했다. 손님이 많았다. 카운터에 아무도 없어서 주방 쪽에 갔다.


사장님께서 말씀하신 주방 이모님이 구석에서 서빙을 하고 계셨다. 폴더로 인사를 했다. 일단 웃으며 나를 반겨주셨다. 다행이다. 사장님한테도 폴더로 인사를 했다. 사장님은 공주가 왜 이런 일을 하냐는 식으로 말씀하시는데.. 뭐라고 받아쳐야 할지 몰라서 그저 웃기만 했다. 일단 나를 돌려보내지 않으셔서 다행이었다. 나는 일을 해야만 했다.


설거지가 밀리진 않았다. 일하고 보니 알겠더라. 이제 식사시간이니 설거지가 나올 일이 없는 거지.. 여하튼 이모님을 졸졸 따라다녀서 일을 배웠다. 이모님 뒤에서 좀 뻘쭘했지만 내가 눈치껏 할 수 있는 건 이것뿐이었다.


환자를 마주치면 정해진 멘트를 줄줄 하듯, 손님을 마주하자마자 이모님은 ‘어서 오세요’부터 시작해서 ‘몇 분이세요? 술이나 음료 드실 건 없으세요?’와 같은 멘트를 줄줄 말씀하셨다. 속으로 감탄하며 구경했다. 나는 언제 저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이모님은 여기서 가장 오래 일을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내 나이를 물어보셔서 답변을 하니, 내 자식이랑 동갑이네라고 말씀하셨다. 자식뻘이랑 일을 한다며..


배운 걸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다 먹은 상 치우는 방법, 다 먹은 불판 꺼내기, 새로운 불판 깔기, 불판 위치, 카운터 계산하는 방법, 추가 주문 시 입력하는 방법, 테이블 위치를 안내받았다. 테이블을 옮길 경우 테이블 위치를 바꾸는 전산도 배웠다.


주방에서는 설거지하는 전반적인 과정, 식기세척기 사용 방법, 다 먹은 불판을 물에 불려서 씻고 세척하는 법을 배웠다.


고무장갑이 짧아서 팔에 자꾸 물이 들어갔다. 물에 불린 설거지들이 구석에 자리 잡고 있어서 고무장갑보다 깊었다. 왼쪽 집게손가락에 손톱 가시레기가 있어서 따끔했다. 거기다 물도 고기 기름 섞인 물이라 최악이었다. 수시로 장갑을 뒤집어서 건조하고, 다시 다른 장갑을 끼고 벗는 걸 반복했다. 이거야말로 시간낭비라 생각했다. (그래서 생각한 게 장갑을 사자! 였다)


8시부터 설거지가 서서히 밀리기 시작하더니 걷잡을 수 없이 일이 돌아갔다. 내가 뭘 한 지 모르겠다. 설거지 한번 하고 그릇을 갖다 놓으니 사장님께서 그러면 시간낭비라고 하셨다. 솔직히 시간낭비다. 나도 이 곳에서 뭘 해야 맞는지 모르겠어서 한 행동이었다. 이모님은 나를 가르치다가도 홀 서빙을 하시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냥 나 혼자 어떤 식으로 일을 해야 하는지 터득해야 했다.


시간이 흘러 열 시 오십 분쯤 되니 야간 이모님께서 출근하셨다. 처음 마주쳐서 인사를 했다.


“여긴 젊은 아가씨가 일하는 데 아닌데.”

음.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여하튼 첫날에는 눈도장을 찍고, 가게가 돌아가는 방법에 대해 전반적으로 알게 됐다. 그리고 금요일에는 손님이 엄청 많았다. 알바를 구하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나는 하루 이천만 원 매출+열두 시간 일어서서 일하는 휴게소 아르바이트도 견딘 사람이라 자부했었는데.. 고깃집 네 시간이 더 힘들었다. 거기는 그릇의 종류가 한 가지뿐인데 고깃집은 그릇 종류만 열 가지가 넘고 집게랑 가위 등 집기류까지 싹 다 씻어야 했다. 나는 그걸 망각하고 있었다.)


그릇을 제대로 정리할 틈도 없이 설거지가 밀려서 결국 열한 시 십오 분쯤에 일을 끝냈다. 팥빙수 두 개 만들라고 하셔서 바로 만들었다. 하나는 이모님 것, 하나는 내 것.. 팥빙수 만들 줄 알지? 여쭤보셔서 만들 줄 모르는데도 네!!라고 말했다. 안 만든 지 오래돼서 팥빙수 기계 속에 얼음을 넣는 것도 까먹고 있었다. 빙수가 코에 들어가는지 입에 들어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흡입했다. 밖에서 엄마랑 동생을 마주했다. 엄마는 왜 이런 일을 하냐고 했다. 아무 말도 못했다.


돈 벌려고 일을 하는거죠.. 일과 병행하며 같이 할 수 있는 알바를 우연히 봤고, 전화를 했고, 오라 했고, 일을 했지요..


오늘 제일 들은 말이 ‘왜 아가씨가 이런 일을 하냐.’는 말이었다.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다. 사실 난 그런 말을 들으면 오기가 생긴다. 여자는 1종 따기 어렵다는 운전학원 강사의 말에 화가 나서 오기로 1종을 딴 적도 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이왕 시작한 김에 나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그리고, 문득 든 생각은, 내가 삼교대였으면 이렇게 하지도 못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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