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방병원 생존기

그래도 일이 빨라진 모양이다. "일이 많이 늘었다. 병원 돌아가는 루틴 조금만 더 알면 일을 능숙하게 잘할 수 있을 거다."는 말을 들었다. 나도 모르게 전화로 지급보증서 떼면서 환자 접수를 하고 있다. 아직 모르는 거 투성이인 주제에 말이다.


병원에 안내문 하나 써붙이려고 문구를 짜는데 공무원 공부하던 습관이 나왔다. 중복되는 단어가 연속으로 나열된 게 매우 거슬려서 나도 모르게 "이 문장 바꿔도 돼요?"라며 훈수를 뒀다. 이런 말 해서 죄송하다 하니 오히려 이런 거 좋아한다고 괜찮다 하셨다. 다행이다.


알사탕처럼 포장되어 있는 공진단을 금색 예쁜 플라스틱 안에 쑤셔 넣는 작업을 했다. 그 누구도 나를 방해하지 않는 평화로움을 거기서 느꼈다. 각자의 사담도 주고받다 보니 나랑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어떤 세계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해소됐다. 다른 간호사 쌤은 단순노동을 하시다가 지겹다고 카운터에 갔다. 나랑 많이 다르신 분이다. 나는 이게 정말이지 좋은데. 24시간 이것만 시켜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랑 안 맞는 간호사 말고 고등학교 졸업하고 삼0 생산직 갈걸.. 이런 말도 했다.


사람 이름을 못 외우는 나한테는 외래 업무가 쥐약이긴 하다. 그래도 내 인생 마지막 가노간호니까 최선을 다해볼까 한다. 하다 보면 익숙해지지 않을까. 그리고 농땡이 피우고 살면 나 자신한테 부끄럽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무도 내가 한 무언가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꼼수랑 요령 피우며 살진 않았다. 애초부터 누군가가 나를 알아줄거라는 기대조차 하지 않고 살았다. 그게 더 정확한 말이겠다.


내가 여태 여기저기 다니면서 사람들한테 받았던 상처가 내 탓만은 아니라는 걸 여기서 깨달았다. 나는 여태 못된 사람을 만나서 인생이 잠깐 꼬였던 거였다. 왜 그 원인을 나한테 돌려서 수도 없는 날을 비수 꽂아가며 살았는지. 지난날이 아쉽다. 그럴 시간에 다른 생산적인 일을 더 할걸 그랬다. 요즘 가장 많이 드는 생각이다. 그만큼 여기 쌤들은 나한테 텃세를 안 부린다.


이제 옛날에 글 썼던 것처럼 의식의 흐름대로 글이 술술 나오는 듯하다. 역시 사람은 마음먹기 달린 건가. 일례로 옛날에는 이 사람한테 쩔쩔맸던 것도 이제는 쿨하게 쌩까는 마인드셋이 생겼다. 이게 원래 내 성격인데 한국의 무한 경쟁 체제가 날 잠깐 나약하게 만든 거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인간이란 원래 간사하다. 나 싫다고 그럴 땐 언제고, 내가 아쉬운 티 안 내니까 수도 없이 연락 온다. 미안하지만 그때의 마음이 내겐 없다.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 이런 상투적인 가사가 진리로 다가오는 순간이다.


전한길 샘이 말하셨다. 인간은 배신하는 존재라고. 그걸 깨닫는 순간 여태 나한테 왔던 파란들이 납득이 되면서 겸허한 자세로 나를 돌아보게 된다. 나도 누군가한테 배신한 존재였을지 어떻게 알고...라는 한 단계 뛰어넘는 생각도 해본다.


어쨌든 내일만 일하면 하루 쉰다. 내일은 공장에 자리 있나 물어보고, 있는 일들 그때그때 쳐내고, 그렇게 무사히 지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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