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수기의 반성 1

지각하던 날들

by 스민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데
비수기에 와서 나의 성수기를 돌아보자니,
아무래도 나는 한창 잘 나갈 때 겸손하지 못했던 것 같다.

뭐 ‘잘 나가던 시절‘이라고 해봤자, 단순히 프리랜서 일감으로 자급자족하고, 일 없는 시기가 아무리 길어도 1주일을 넘지 않는 것 정도로 정의할 수 있겠는데. 다양한 종류의 일을 여기저기서 의뢰받다 보니, 일정상 혹은 기분 따라 일을 거절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업무 중에서 원하는 일을 직접 ‘선택‘할 수 있었다.

남들이 으레 말하는 성공의 기준을 따라 유명인이 된 것도, 떼돈을 번 것도 아니지만, 내 기준에서는 원하는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율성과 수입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은 프리랜서로서 만족하기 충분했다. 따라서 나는 이 시기를 ‘잘 나가던 시절‘로 부른다.


서론이 조금 길었는데,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비수기로 인해 평일 낮 시간이 많아지고 동시에 생각할 거리도 많아지다 보니, 과거 ‘잘 나가던 시절‘의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 가장 후회되는 날을 꼽으라면, 망설임 없이 클라이언트와의 약속에 심하게 늦었던 그날을 꼽겠다.

유명 엔터테인먼트사 플랫폼의 영어 번역을 맡게 되면서 담당자를 처음 만난 날.


그 당시만 해도 딱히 K팝을 좋아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수많은 외국인 한영 번역가들 사이에서 한국인이라는 게 장점이었던지 아니면 한국 콘텐츠를 비롯해 다양한 콘텐츠를 다루는 번역가 이미지가 있었던지, 어느 날 뜬금없이 지인 소개로 그 유명 엔터테인먼트사(이하 줄여서 엔터사)의 정기적인 콘텐츠 번역 업무를 제의받았다.


그때 첫 계약을 하면서 담당자는 처음이니만큼 직접 얼굴을 한번 뵈면 좋을 것 같다며 점심 식사를 제안했다. 클라이언트와의 식사는 연말이나 연초가 아니라면 흔치 않은 일이었지만, 흔쾌히 받아들였다.


문제는, 늘 집에서 시간개념 없이 혼자 일하는데 익숙해져 있는 데다 출근도, 퇴근도 없다 보니 클라이언트의 평일 점심 약속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는 것(물론, 지금은 무척 대단한 행사로 여깁니다).

나의 몹쓸 꾸물거리는 습관을 잊어버렸다는 것.


여기서 잠시 내가 처한 환경에 대해 잠시 설명을 해야겠다. 현재 경기도에 살고 있는 나는 서울에서 약속을 잡으면 가장 가까운 강남권 지역까지 기본 한 시간이 걸리며, 한 시간 반은 잡아야 여유롭게 도착할 수 있다. 강남권이 아닌 다른 지역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래 걸린다.


그날도 점심시간이니 미리 일찍 나가야지, 분명 마음은 굳게 먹었다. 문제는 마음먹은 대로 몸뚱이를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

대체 왜 그렇게 꾸물거렸는지.….. 지금까지도 후회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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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스민. 문화예술계의 '카멜레온' 같은 영어 통·번역사. 에세이 <오 마이 갓김치!>에 이어, 프리한 프리랜서 번역가의 일과 삶을 기록 중입니다. 진지하게 쓰다가 가끔 웃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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