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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 Jun 04. 2024

나의 하루 나의 밤

밤에만 찾아오는 방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익숙하고 외로운 방이지만 누군가에겐 잠이 오지 않아 괴롭고 짜증이 나는 방입니다.

나는 이 시간이 좋습니다. 누군가와 철저히 단절된 시간 속에서 온전히 나를 사유하는 데에만 시간을 허비할 수 있는 이 시간이 좋습니다.


누군가는 이런 나를 한심하다 말하겠지요. 맞습니다. 나는 한심합니다. 그들의 날 서린 말을 받아칠 배짱도 없습니다. 철저히 나로 있고 싶은 것에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저 누군가를 만나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혼자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것뿐입니다.


혼자 있을 때 무엇을 하냐고요? 생각보다 별 건 없습니다. 혼자 술을 마시며 몽롱함에 젖거나 영화를 보면 현실을 잊기도 합니다. 유튜브를 보며 깔깔 웃기도 하고요. 낮에 보내도 그만인 별거 아닌 일이라 생각되죠? 맞습니다. 정말 보잘것없는 일상이에요. 그래서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싫은 기분이 드는 거 같아요. 나만의 소소한 일탈을 누군가에게 들켰을 때 찾아오는 민망함은 생각보다 크거든요. 이불속 발길질을 유발하기도 하고요. 그만큼 너무 사소해서 남에게는 보여주기 싫지만 나에게는 애틋합니다.


요즘 유튜브를 보면 열심히 지내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각자 자신의 꿈을, 목표를 향해 노는 것도, 사랑도 뒤로한 채 묵묵히 노력하는 사람들이요. 그들은 별처럼 반짝여요. 그 찬란한 반짝임에 넋을 잃고 바라보다 보면 가슴속 어디에서부턴가 꿈틀거리는 창피함과 미안함이 고개를 쳐드는 터라 제 고개는 자꾸만 땅을 보게 되고요.


저는 잘되면 안 되는 사람입니다. 꿈이 있고 꿈을 위해 노력을 안 하지는 않지만 절실함이 없습니다. 미디어에 나오는 사람들과 비교하자면 저는 유치원에서 역할놀이를 하는 정도거든요. 이런 제가 잘 된다는 건 열심히 사는 분들에게 미안한 일이에요. 저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그들처럼 되기 위해 작년 한 해는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을 했지만 제 바람대로 되지 않았어요. 물론 첫술에 배부르겠냐만 그쯤부터 어두운 기운이 스멀스멀 저를 집어삼키더니 이따금 정신과 육체를 지배하기 이르렀답니다.


현재 제 삶은 바닥에 맞닿았고 빛도 보이지 않는 깊은 곳으로 내려갈 일만 남았습니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지만 볕은커녕 전구의 빛도 들지 않아요.

이런 제 삶이 나아질까요? 혹시나 제가 잘 된다면 그건 여러분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뜻입니다. 저는 낭떠러지에 서있고 떨어질 일만 남았거든요.


히틀러가 태어날 걸 미리 안다면 그를 죽이는 게 옳은 일일까요?

갑론을박이 많겠지만 미래의 참혹함을 안다면 미리 벌한다는 개념으로 그 생명을 없애는 것이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는 우울로 가득 찬 수조에 깊이 잠겨있습니다. 누군가를 만나도 우울한 기운밖에 줄 게 없어요. 그렇다면 저도 타인에게 우울을 전파하기 전에 없어지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둠이 있기에 빛이 있다지만 이건 어둠 이면의 끈적끈적한 무엇이거든요. 굳이 느낄 필요 없는.


밝았던 때에는 우울한 사람을 일부로 만난 적이 있어요. 그들에게 밝은 기운을 주고 싶었거든요. 세상은 생각보다 살만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저에게 그런 기운을 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아요. 사실 존재한다 해도 제 쪽에서 거절할 거예요. 시간 낭비예요. 저에게 그런 선행을 한다고 해도 바뀌지 않아요. 오히려 본인에게 손해입니다.


요즘 부쩍 죽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최대한 고통스럽지 않게 죽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고민도 하고요. 당장 그럴 자신은 없습니다. 누군가는 자살에 관한 기사를 보고 ‘그럴 용기로 현재를 열심히 살지 왜 죽는지 모르겠다, 한심하다’라고 말하더군요. 저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죽을 용기만 있지 현재를 살 용기는 사라진 사람들이니까요.


현재를 살 용기도, 죽을 용기도 없는 저는 집에 웅크린 채 언젠가 닥칠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일 준비를 한 채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현재의 삶을 유지하면 변화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걸 잘 알지만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는 심정이에요. 내 몸 하나 망가뜨리는 건 자신 있다 이겁니다. 내가 내 몸 어찌하는 건 순전히 내 자유이니까요. 누군가의 앞에서 스스로를 해쳐 정신적 충격을 입히지 않는다면야 괜찮은 거 아닌가요? 인간은 모두 죽는걸요.


사람이 죽으면 경찰에서 조사를 합니다. 자연사 등 타당한 죽음이었는지 확인을 하는 것입니다. 타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니까요. 그 타당한 죽음에 자살도 끼워 넣으면 어떨까 싶어요. 마음의 병으로 인한 자살도 병사라고 생각하거든요. 통제를 벗어난 마음이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은 몸을 파괴시키는 암세포와 다를 게 없습니다. 물론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범죄로 이어질 수도 있는 문제고요. 그러니 죽고 싶은 사람은 빠르고 안전하게 죽을 권리를 주길 바랍니다. 원해서 태어난 사람 아무도 없는데 왜 죽는 것은 함부로 할 수 없는 건가요?


최근 복지부가 자살을 막기 위한 대책으로 번개탄을 생산 금지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인체 유해성이 높은 번개탄 대신 친환경 번개탄을 개발하여 보급하겠다는 취지에서였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번개탄이 애초에 자살을 권장하려 만들어진 물건이 아닌걸요. 고층건물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하는 일이 늘면 옥상 개방에 제한을 두고 창문이 열리는 정도에도 제한을 둘 건가요?      

인구수가 줄면 국가적으로도 문제가 됩니다. 관점을 바꾸어서 생각을 해보면 어떨까요? 자살을 허용한다고 급진적으로 인구수가 줄어든다면 그것은 개개인에 문제가 있는 것인가요? 선진국의 자살률이 높은 이유는 무엇에서인가요?


꼬리의 꼬리를 무는 질문은 계속해서 늘어갑니다.

사람은 생각하기에 사람이라는데 그렇다면 나도 아직 사람인가 보구나, 싶어요.

먹고살만하니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고 할지도 모르겠어요. 맞아요. 아직 살만하니, 살아있으니 이런 돈도 안 되고 인생에 도움도 안 되는 하등 쓸모없는 고민을 하며 밤을 보내는 것 일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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