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 감자 Jun 02. 2023

풍선을 놓친 아이

영어유치원, 학원 뺑뺑이, 어린이의 세계

#1

 맥도날드에 갔다. 내 뒷자리에 할머니들이 있었다. 대화를 들어보니 손주들이 조부모 손에 크고 있다는 점, 손주들은 많은 학원에 다닌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어르신들의 대화는 영어 유치원이 어떤지, 수학 수업이 어떤지 같은 주제로 가득했다. 조부모의 손을 빌려야 하는 부모의 상황도 안타깝지만, 학교에 가기 전부터 학원에 가야 하는 어린이들이 더 불쌍했다.


 이중언어를 기대하며 영어 유치원 보내는 부모를 뜯어말리고 싶다. 어른의 욕심만큼 아이에게 도움 되는 곳이 아니라 생각한다. 아이는 말을 무서운 속도로 배운다. 성장하는 아이는 짧은 시간에 적어도 하나 이상의 언어를 어려움 없이 습득한다. 어떤 부모도 아이에게 한국어 문법구조를 설명하지 않는다. 우리가 영어를 배울 때 같이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않아도 아이는 한국어를 큰 어려움 없이 습득한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이 엄청난 능력은 모국어(First Language)를 배울 때만 발휘된다. 엄격한 의미의 이중언어 화자는 드물게 존재한다. 한 컴퓨터에 OS는 하나인 것처럼, 아동의 뇌에 모국어(First Language)로 정착되는 언어는 하나다. 한국어가 정착되지 않은 아동에게 모국어 배울 시간을 줄여가며 외국어를 가르치면 한국어도 외국어도 못하게 된다. 죽도 밥도 아닌 언어 실력이 되어버린다.


 어린이에게 필요한 공부는 세상을 경험하고 이해하기 위한 공부다. 절대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한 도구가 되어선 안 된다. 아이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이유는 문자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함이지, 받아쓰기 100점 맞기 위해서가 아니란 말이다. 새로운 모험으로 가득한 어린이의 세상을 문제집으로 가리는 것만큼 큰 죄가 있을까?


#2

 홍대 언덕 위 횡단보도에서 아이가 풍선을 놓쳤다. 아빠는 뛰쳐나가는 아이를 붙잡았다. 풍선은 잡을 수 있는 거리지만, 잡을 수 없는 곳에서 통통 굴러갔다. 아이는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풍선은 달리는 차 사이를 통과하며 점점 멀어졌다. 언덕 아래에 있던 아저씨는 굳이 횡단보도까지 올라와 차도 경계석에 걸린 풍선을 주웠다. 그리고 아이가 볼 수 있게 풍선을 가슴까지 들어 올렸다. 하얀 풍선은 조금의 상처도 없이 아이의 손으로 돌아왔다. 풍선을 지나치지 않은 어른의 친절이 아이의 하루를 지켰다.


#3

 풍선을 주워주는 마음은 지갑을 주워주는 마음과 다르다. 어린이의 세상이 보였기에, 풍선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했기에 아저씨는 풍선을 주울 수 있었다. 영어유치원과 학원 뺑뺑이가 부모의 사랑일 수 있겠다.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라가라는 스카이캐슬의 대사처럼, 아이는 고려하지 않은 뒤틀린 사랑이어서 문제지. 왜 어른들은 미취학 아동에게 무엇을 바랄까. 그저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면 그것만으로 충분한 시기인데. 학원 다닐 시간에 놀이터 한 번 더 가고, 유치원 끝나고 맛있는 간식 먹고, 양육자와 시간을 보내는 게 더 행복한 하루일 텐데.


 부모 탓만 하고 싶지 않다. 부모에게 아이를 키울 충분한 시간을 주지 못한 사회, 공부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 유리한 위치에 서는 도구로 전락한 사회.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부모에게만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다만 부모라면, 어린이의 세계를 외면하지 말아 달라는 말을 하고 싶다.


 한 아이는 영어유치원에 다녀왔다. 한 아이는 풍선을 돌려받았다.

어느 하루가 기억에 남는 하루였을까. 어느 하루가 행복한 하루였을까. 정답은 맑고 초롱초롱한 눈동자에 훤히 비치지만, 욕심에 사로잡힌 어른에게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작가의 이전글 대가리에 먹물이 찬다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