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뻐렁치는 순간
때는 바야흐로 2022년 12월 29일. 추운 연말 뜨끈뜨근하게 데운 거실 바닥에 앉아 게임을 하던 중이었다. 당시 매주 목요일 밤 10시 조선TV에서는 '미스터트롯2' 경연이 한창이었다.
여동생이 좋아하는 가수가 출연한다는 이유로 우리 가족은 반 강제적으로 해당 프로그램을 시청해야만 했다. 트로트는 좋아하지 않고, 여동생이 좋아하는 가수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던 나는 닌텐도 게임기를 들고 앉아 귀만 열어놓고 있었다.
함께 앉아있던 엄마는 연신 "다른 데 틀어라!"를 시전 중이셨다. 이전에 방영되었던 같은 계열 경연 프로그램에서 지지하던 가수들이 중도탈락하는 결과를 몇 번이나 맛본 시청자로서의 고집이었다. 그러나 동생은 꿋꿋했다. 엄마를 다독이며 TV채널을 사수했다.
3년 전, 코로나가 막 창궐하기 시작할 즈음 방영했던 '미스터트롯'에서 엄마가 응원하던 가수가 있었다. 이름은 '안성훈'. 노래를 너무 예쁘게 잘 하는 친구가 생계를 위해 작은 주먹밥 집을 경영하고 있다는 사연이 엄마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엄마는 그가 출연할 때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응원하셨다. 결과는 팀 메들리전 탈락. 엄마는 진심으로 슬퍼하셨고 프로그램 하차 후에는 유튜브에 그의 이름을 검색해 나오는 영상을 죄다 섭렵하며 응원을 이어가셨다. 덕분에 우리 가족 모두가 그 이름을 알 수밖에 없게 되었다. '주먹밥 집 하는 안성훈'. 반 강제로 노래 영상을 보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미스터트롯2'에 재도전장을 던진 모양이었다.
"안성훈 나오네, 엄마!"
동생이 소리쳤다. 빨래를 개던 엄마와 게임을 하던 내가 동시에 TV로 시선을 돌렸다. 그, 안성훈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 없구만."
"아, 지나갔네. 나오면 말해 줄게."
엄마와 나는 다시 하던 일로 돌아갔다.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 여동생은 조금 전보다 더 크게 소리쳤다.
"저기! 안성훈!"
또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디에 안성훈이 있다는 건지. 한때 엄마의 열렬한 응원을 받았던 그 청년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던 터라 관심이 간 건데. 그놈의 안성훈은 왜 동생이 볼 때만 비치고 내가 볼 때는 사라지는 것인가.
"아, 저기 있잖아! 안 보여??"
"없구만!!"
심지어 지금 화면에 있다는데. 내 눈에는 통 보이질 않는 것이다. 여동생은 가슴을 치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그래도 어쩌겠나. 내가 아는 안성훈이 저 화면 어디에도 보이질 않는데.
"그냥 노래 부를때 말해 줄게."
나의 게임 플레이는 계속 되었다. 그리고 이윽고 그의 차례가 왔다.
"봐라! 나왔잖아!!"
나는 보고 말았다. 복부에 '안성훈' 이름 세 자를 커다랗게 붙이고 등장한 그 남자를. 그리고.
빼앗기고 말았다. 마음을.
첫눈에 반한다는 말은 이럴때 쓰는 것이다. 나는 TV화면 속에서 생글생글 눈웃음을 치고 있는 조신한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왜 저렇게 예뻐졌어?!!"
진심으로 놀랐고, 진심으로 환희했다. 너무 예뻐서.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예쁜 애가 노래도 잘한다. 귀가 뻥 뚫리고 심장이 벌렁벌렁 나댔다. 트로트가 그렇게 맛깔나고 듣기 좋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 순간 알았다. 안성훈이 주현미의 비에 젖은 터미널을 부른 그 3분여 시간 동안.
"미쳤네. 오늘부터 안성훈이 내 원픽이다."
그때부터다. 나는 안성훈에 진심이 되었다. 당장 팬카페를 검색해 가입하고, 미스터트롯2가 방영되는 목요일을 기다렸다. 한 계단 한 계단, 위로 올라가는 관문 하나하나를 통과할 때마다 가슴 졸이며 응원했다. 점수가 생각처럼 좋지 않아 탈락 위기에 놓이면 두 손을 가슴 앞에 꼬옥 모아 기도했다. 제발, 제발, 제발.
위기를 넘기고 심사 점수가 안정권에 들거나, 살아남은 참가자들 중 1등을 먹기라도 하면 세상을 얻은 것처럼 날뛰며 기뻐했다. 가족들이 유난이라 타박해도 어쩔 수 없었다. 가슴이 시키는 일을 머리와 몸이 어떻게 거부할 수 있을까.
안성훈의 여정은 굴곡이 많았다. 그의 성공을 무엇보다 바라는 팬으로서 그 과정을 모두 지켜보는 일이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놓을 수 없었다. 꼭,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의 미래에 '고생'이라는 단어가 지워지길 간절히 바랐다.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떤 계기로든 안성훈을 가슴에 담은 팬이라면 다 같은 마음으로 빌었으리라.
제발, 그의 모든 시련과 노력이 성공으로 보상 받기를.
그리고 바람은 현실이 되었다. 사회자 김성주가 미스터트롯 2대 眞, 우승자의 이름을 호명한 순간. 그 이름이 내가 3개월간 절실히 원한 이의 것임을 인지하고 만 그때, 나는.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말 그대로 '오열'했다. TV속의 그도 울고, 그의 부모님도 울고, 나도 울었다.
가족들은 펑펑 우는 내가 웃기다고 배꼽을 잡았다. 여동생은 휴대폰을 들이밀며 촬영까지 했다. 두고두고 보며 웃을 거라고.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행복했다. 내가 응원하는 가수가 걸어갈 길이 꽃길로 펼쳐지는 벅찬 감동의 순간이.
그리고 몇 개월이 지났다. 미스터트롯2의 후속 예능이 발표되었다. 팬들에게 사연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내 사연을 올렸다. 방송에 내 사연을 보낸 것은 중2때 즐겨듣던 FM라디오 이후 처음이었다.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 정도의 마음이었다. 뽑히고 싶은 사연자가 수백일텐데, 내 사연이 눈에 띄겠나 싶어서 보내놓고 잊고 있었는데.
채택되고 말았다. 그게 지난 5월의 일이다. 제작진의 안내에 따라 내 가수와 통화를 하고, 그 내용이 방송을 탔다. 덕질하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그 단어를 여기에 갖다 붙이면 딱이다.
계탔다.
내 가수한테서 전화가 왔다. 심장이 터질 것 같더라. 아무 생각도 안나서 인사를 몇 번 했는지 방송에 그대로 송출되었다. 6번 했나 보다. 떨려서 죽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이라 생각한다.
주변 지인들은 그 방송을 보고 "네 그런 목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어."라고 하더라. 좋아하는 게 그대로 보이더라는 말도 여러 명에게 들었다.
좋았다. 안 좋으면 이상하지. 정신줄을 놓을 정도로 좋았고, 지금도 좋다. 안성훈을 매일 보고 싶고, 매일 듣고 싶다. 매일 듣기도 한다. 이미 그는 내 일상의 한 부분이 되어 버렸다.
언젠가는 글로 이 마음을 남겨놔야지, 생각만 하고 있었다. 어쩌면 생각만으로 끝낼 수도 있었으나. 그냥, 오늘은 이 이야기를 하고 가야겠어서 노트북을 열었다. 이런 걸 '사랑이 뻐렁친다'고 하면 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