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간관계가 시시해지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20년 전 MBTI에 대해서 지금처럼 보편화된 아이디어가 없을 때부터 나의 '왜' 병은 시작됐다. 알고 싶었다. '왜' 병이 가장 심각했을 때를 돌이켜보면 다름 아닌 20대 초반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각의 작은 고리들 마저 다 알아야만 한다고 믿었다. 곁에 있는 이늬 생각의 끄트머리에 있는 가치관과 이념에 닿기 위해 온갖 에너지를 쏟아내먀 이해하고자 했다. 영화나 그림 등의 작품에 대한 생각부터 삶과 죽음, 소수자의 인권까지. 이해의 범주는 끝이 없었다. 10년 지기 친구 C는 나의 끊임없는 질문 세례에 눈물이 찔끔 났다는 농담을 요즘도 가끔 한다.
"너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흰색"
"너한테 흰색은 뭔데?"
"...."
글을 쓰는 일을 직업으로 갖기 시작하면서 나의 '왜?'는 다른 사람들이 닿을 수 없는 곳까지 뻣어나갈 수 있는 특별한 점이 됐다. 인터뷰하면서 마주 앉아 한 사람의 세계를 짧은 시간 안에 파악해야 하는 일은 내가 자의로 수년간 훈련(?) 해왔던 일이기도 하다. 이따금 '어쩜 당신 앞에서는 다른 이들에게 안 하던 이야기까지 털어놓게 된다'는 피드백을 듣기도 했다. 이제와 고백하자면 '왜'는 나의 기민함을 드러낼 수 있는 강력한 한 방이기도 했고, 한 사람을 다각도로 이해하려는 뜨거운 애정이기도 했다. 나는 대화로 타인과 연결되기를 바랐고, 깊은 이해가 한 사람을 사랑하는 과정이라 믿었다. 그랬던 나조차도 내가 30대로 접어들면서 더 이상 집요한 '왜'를 외치지 않는다. 끊임없이 그 이유를 묻고, 이해해 가는 과정 역시 ENTP에게도 진 빠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이 삶의 중심에 떡하니 자리 잡은 이후부터 인간관계는 보다 비선택적으로 펼쳐진다. 이해하고 싶지 않은 이들과도 함께 해야 하고, 사람이라는
존재 외에도 받아들여야 할 세계가 방대해졌다. 작은 안부조차 궁금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기어코 편린처럼 흐릿해져 간다. 이제는 모든 생각의 시작점을 이해해야만 그 사람을 깊숙이 알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나의 사람들과 대화할 때면 3D 퍼즐을 즐겁게 맞추곤 한다. 360도로 돌려가며 상대방의 일상에서 발견한 작은 조각들을 끼워 넣을 때면 한 사람의 세계를 더욱 풍성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아주 작은 단면의 끄트머리에도 사랑하는 이의 삶에 대한 가치관과 행복, 불안이 걸려 있다. 완결을 상상할 수 없는 이거대한 행성은 왜냐고 되묻는 순간 무한히 증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