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험생
대학교 졸업 후 나와 전혀 상관없는 단어였다. 대학 4년을 빠르게 마치고 취업하는 것이 목표였다. 내 인생에서 더 이상의 공부는 없다고 생각했다. 대학원 같은 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고, 공부하는데 시간이 많이 드는 직업 같은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대학교 졸업 11년 후 나는 팔자에도 없는 수험생이 되려했다. 왜?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뜬금없는 선택이었다. 덜 괴롭게 살고 싶어서 퇴사해놓고 또 다시 괴로운 길로 들어서려했다. 자기자신도 모르게 빠져드는 관성의 법칙. '쓸만한 돈벌이'에 대한 집착.
대기업 과장급에 준하는 직업이 뭐가 있을까? 전문직 중에서 찾아야하지 않을까? 전문직 중에서 뭐가 만만하지? 그래 세무사다! 뻔뻔할 정도로 단순한 사고방식과 자신감. 그 단순함으로 시작은 빨랐다.
서울 유명학원에 상담갔다가 통원하기는 무리일 것 같아 인강으로 등록하고 도서관에 다니기 시작했다.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 어학능력점수를 뚝딱 만들고 일단 세무사1차 필기시험을 접수했다. 어학공부를 전혀 하지 않다가 갑자기 벼락치기를 했음에도 필요한 점수를 받으니 자만심은 더욱 올라갔고, 전문직 시험을 우습게 보기에 이르렀다.
다행히(!) 자만심은 금세 사라졌다. 6개월만에 필기, 실기 모두 합격한다는 나의 계획이 얼마나 무모한 것이었는지는 인강을 조금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공부양은 방대했고, 내용은 생소했으며, 심지어 나는 진득하게 앉아서 공부하는 능력도 습관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인강 30분 듣다가 잠들었고, 답답해서 산책을 다녔다.
수험생은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을 칭하는 말이지 시험을 준비한답시고 휴식을 취하는 사람에게 해당하는 말은 아니다. 회사원 다음에 내가 선택한 길은 수험생이었지만 수험생이 되지 못했다. 다들 수험생은 아무나 될 수는 있다고 생각하지만 수험생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고작 3개월안에 벌어진 일이었다. 퇴사 다음으로 잘한 선택이었다. 다니기 싫은 회사를 그만 두고 하기 싫은 공부를 할거면 그냥 다니기 싫은 회사를 다니지 그랬어? 라는 생각이 들자 한 글자도 들여다보고 싶지 않아졌다.
내 인생에서 크다고 생각했던 것(=회사)을 그만뒀더니 그 다음에 무언가를 그만두는 일은 너무도 쉬웠다. 세상에 직업이 세무사 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다른거 하면 되지. 그리고 세무사라니! 나 숫자 싫어하잖아. 이거 왜 하려고 했었지?
지금 생각해도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퇴사 후의 공백이 혼란스러워서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돈이 문제였으면 그냥 회사에서 버텼어야지. 그렇다.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그래서 다음 선택은 절대로 '돈'을 고려하지 않기로 했다. 오직 나의 마음이 이끄는대로. 그렇게 하자.
그리고 그 결심은 자주 흔들리며 지켜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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