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의 일을 열심히 하는 타입
부재중 전화가 찍혀있다.
고향친구다. 무슨일이지?
다시 전화를 걸어봤다.
- 친구 : 여보세요.
- 나 : 응. 전화했었어?
- 친구 : 아, 아까 부탁할 게 좀 있어서 전화했는데 이제 괜찮아.
- 나 : 뭔데? 궁금하게.
친구는 공항에서 근무한다. 지지난달 정도였던가? 코로나 사태로 3주정도 무급휴직을 받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당시 우리 동네에서 단기 알바를 했었다는 사실은 처음 들었다. 그 회사에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고 한다. 내일 와줄 수 있겠냐고. 우리집에 와서 숙박을 하고 내일 출근할까 싶어서 전화했었다고 한다. 친구는 멀리산다. 왕복 3시간인데 굳이 하루 알바를 하러 여기까지 오겠다고? 대단하다. 무급휴직 때 알바를 했던 것도 지나치게 부지런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번에는 더욱 과하다. 이 친구야, 좀 쉬어. 체력도 약하면서.
- 친구 :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왔다갔다 시간도 너무 오래걸리고 피곤할 것 같아서 그냥 안가려고.
다행이다. 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공항 출근도 정상적으로 하고 있으니까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너가 해보는 건 어때? 꿀알바야. 일도 쉽고 사람들도 친절해.
친구는 나에게 알바대타를 제안했다. 나? 귀찮다. 시간 뺏기고 싶지도 않고.
- 아니. 귀찮아.
1초도 고민하지 않았다. 분명 전혀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 일에나 집중해야지 알바할 시간이 어디있어.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친구와 서로의 근황이야기를 나누던 중 갑자기 말해버렸다.
- 나 그냥 할래!
- 그래. 한 번 해봐. 여기 괜찮아. 그럼 니 연락처 넘긴다?
- 응.
무슨 변덕이었을까. 갑자기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판은 개인사업자지만 본질은 장기백수인 나에게 오랜만의 단순 작업은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머리가 복잡할 때는 몸을 움직이면 해소가 되기도 하니까.
근무조건은 다음과 같다.
- 출근시간 : 오전8시 50분
- 근무시간 : 오전 9시 - 오후 6시 ( 총 8시간. 점심시간 1시간 제외 )
- 일당 : 8만원 ( 당일입금 )
- 업무 : 단순 포장업무 ( 화장품 포장 )
기분전환도 하고 일당도 바로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신이 났다. 아르바이트는 어차피 시간제니까 설렁설렁 하다가 와야지! 라고 생각했다.
다음날이 되었다. 신나는 출근날! 직원들은 친절했고 근무환경도 적당히 깔끔했으며 일은 정말 단순했다. 박스를 접어서, 화장품 패키지를 10개씩 담고, 박스를 닫아 테이프를 붙이면 되는 작업이다. 담당직원은 나에게 일을 주고는 본인 할 일을 하러 나갔고, 그 작업 공간에는 나 혼자 있게 되었다. 이 단순하고 자유로운 작업환경이라니. 마음에 든다.
오랜만의 단순작업이 재미있었는지 나도 모르게 속도가 붙었다. 테이블에 놓여있던 화장품을 금방 다 포장했다. 다음 일거리를 물어봐야 하는데 직원은 안보이고, 연락처도 몰랐다. 옆에 큰 박스에 같은 종류의 화장품이 담겨있었다. 이것도 하면 되는 건가? 물어보고 하고 싶었지만 마냥 기다릴 수 없어 그것도 포장하기 시작했다. 노동요도 틀어놓았다. 음악 들으면서 하는 단순 작업은 더욱 신이났고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한참 후 담당직원이 들어오더니 빈 테이블을 보고 말했다.
- 빨리 하셨네요?
응? 빠른건가? 테이블에 있는 건 아까아까 다했는데. 직원이 왔으니 예의상 음악은 얼른 껐다.
- 아. 테이블에 있는 건 다해서 여기 박스에 있는 거 하고 있었어요. 이것도 하는 거죠?
직원이 난감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표정만 봐도 알겠다. 괜히 했구나.
- 혹시 어디까지인지 기억하세요?
- 아뇨... 하면 안되는 거였어요? 어떡해요!?
- 괜찮아요. 다시 풀면돼요. 제가 설명이 부족했네요.
이런 낭패가. 안해도 되는 것까지 하다니. 내가 과했다. 말을 들어보니 박스에 있던 제품은 아직 시리얼 넘버를 찍지 않아서 포장하면 안되는 상태였다고 한다. 테이블에 있는 것만 하고 쉬고 있으면 되었는데 왜 그렇게 부지런을 떨었는지. 힘 좀 빼자, 힘 좀. 분명 천천히, 설렁설렁 일하겠다고 다짐했던 것 같은데. 잊고있던 노동본능이 발동되어 제어가 잘 안된다. 이 뼛속까지 밴 근로자 본능같으니.
그 후로는 작업이 계속 이어졌다. 직원은 계속 제품에 시리얼 넘버를 찍어서 테이블에 올려놓았고, 나는 계속 테이블에 있는 제품을 박스에 포장했다. 직원은 나에게 수시로 말했다.
- 쉬엄쉬엄하세요.
- 좀 쉬세요.
- 쉬면서 해도 돼요.
.
.
.
- 손이 빠르시네요.
- 전에 많이 해보셨어요?
아니요. 포장알바는 처음인데요. 이건 뭐지. 천천히 하라는 뜻인가? 처음에는 순수하게 나를 생각해서 쉬면서 하라는 말인 것 같았는데, 자꾸 들으니 천천히 좀 했으면 좋겠다는 말로 들렸다. 내가 테이블을 빨리빨리 비우면 직원도 시리얼 넘버 찍은 제품을 빨리빨리 올려놓아 주어야 할 것 같은 압박이 드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빨리빨리 하는게 더 재미있는 걸. 작업이 단순하다 보니 작업 자체에서 재미를 느끼기는 어렵다. 나에게 포장 단순작업의 재미 포인트는 2가지였다.
1. 작업속도 점점 높이기 ( 하다보면 속도가 계속 빨라지는데 점점 최적화되는 것 같은 그 느낌이 재미있다 )
2. 작업물이 점점 줄어들 때의 쾌감 ( 쌓여있는 일거리가 줄어드는 것이 눈에 보이니까 재미있다 )
결국 5시 반에 업무가 마무리되었다. 회사에서 필요한 포장량을 다 채운 것이다. 담당직원은 관리자랑 통화를 하더니 나에게 말했다.
- 이제 가셔도 될 것 같아요.
- 벌써요? 아직 시간 안됐는데.
- 빨리 해주셔서 빨리 끝났네요. 감사해요.
- 네. 저도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조퇴다 조퇴. 30분 일찍 끝나서 퇴근길 정체도 덜 할 테고 아주 좋군. 만족스럽고 뿌듯한 기분으로 퇴근했다. 정확히 한시간 반 후 일당이 입급됐다. 칼입금이라더니 정말 칼이다. 하지만 입금 확인을 위해 핸드폰을 클릭하는 순간 기분이 상해버렸다. 8만원이 아니라 7만5천원이 입금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30분 빨리 끝내준 게 아니라 7시간 반만큼만 나를 쓰고 다 썼으니까 보낸 거잖아? 그러면 그렇다고 말이라도 해주지.
치사하다. 기분이 좋지 않다. 누가 시켜서 열심히 한 것도 아니고 5천원이야 없어도 그만이지만 늘 그렇듯이 중요한 건 기분이니까. 갑자기 팔이 아픈 것도 기분탓일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열심히 한 건 나지만 열심이었던 나의 노동력이 아까워졌다. 오천원에 기분이 휙휙 바뀌는 나도 참 치사하다. 회사도 치사하고 나도 치사하고. 뿌듯한 하루가 치사한 하루로 바뀌는 순간이다.
오천원에 씁쓸한 치사함을 느끼면서 반성한다. 퇴사하고 나의 일을 하겠다고 이것저것 찔러보는 요즘. 말만 앞서고 게으르게 움직였던 나를. 내 일을 알아서 해야 할 때는 한껏 게으르다가 누군가 일을 정해 주니까 제어가 안되도록 부지런해졌던 나를.
이 정도면 나 정말 근로노동 체질아니야? 창업이고 사업이고 다 필요없고 다시 취업 해야하는 것 아니야?
그럴지도 모르지만 근로자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써는 근성 정도는 있다. 고용되지 않고도 의미있는 돈을 버는 그 날까지 이 느낌 그대로, 근로노동할 때의 부지런함 그대로, 내 일을 좀 더 열심히 해보기로 한다.
일당 7만 5천원보다 훨씬 값진 깨달음을 얻었다. 사실 나는 마음만 먹으면 엄청 부지런하구나.
그러니까 남의 말만 듣지 말고, 이제 내 말 좀 들어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