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승은 망고빙수 맛

<여름은 그곳에 오래 남아> 마쓰이에 마사시, 비채

by 정다

일 년에 한두 번 외박을 한다. 대학 친구들과 긴 수다의 밤을 보내기 위해서다. 우리는 최근부터 과거로 시간을 거슬러 간다. 아무리 멀리 가도 기껏해야 10년 전이다. 학부 시절까지 가려면 일박으로는 모자라 일박을 더 추가해야 할 것이다. 조식으로 뜨끈한 콩나물 국밥을 먹고 왜 이렇게 빨리 가느냐는 친구들을 뒤로한 채 기차에 올랐다. 왜긴 왜야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지. 기차는 덜컹거리며 서서히 나아가고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투명한 유리창에 맺힌다. 잔잔하지만 한 번에 한 음씩 정확하게 고막을 울리는 월광소나타 1악장을 틀었다.


그러니까 스물. 내키는 대로 살면 되는 줄 알았다. 어찌나 결석을 많이 했던지 1학년 때는 성적표에 '학사경고' 네 글자가 적혀있었다. 같이 놀았는데 친구들 성적표는 멀쩡하다는 사실에 놀랐다. 물론 친구들도 깜짝 놀라긴 했다. 내가 이렇게까지나 관리를 안 했는 줄 몰랐다면서. 아마 대책 없는 자유와 막연한 방황 그 어디쯤에서 혼자 살고 있었나 보다.


'지금의 나'가 중요하다고들 하지만 그건 어디선가 뚝 잘려 나온 '나'는 아니다. 내키는 대로 살았던 과거와 연결된 '지금의 나'를 데리고 미래로 가야 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계절학기 수업비를 마련하고 방학에는 출석을 했다. 여름에는 등줄기에 땀이 흘렀고 겨울에는 발끝이 시렸다.


늦은 변명을 하자면 잘하고 싶은 마음과 실제로 잘하는 것 사이에서의 방황이었다. 잘 해내야 한다는 압박 때문에 시작조차 못했던 것이다. 취업을 하고 나서는 들이닥치는 상황 덕분에 잘하고 싶은 욕심을 내려놓았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안 하는 것보다 낫다는 걸 배웠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 때마다 뒷목이 뻣뻣해지는데 가볍게 고개를 좌우로 털어버린다. 일단 시작을 해야 고칠 수도 있다.


"여닫이가 나쁜 문짝 같던 내 행동거지가 조금씩 덜컹거림이 줄어들면서 레일 위를 매끄럽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이 느껴졌다."

맨발에 닿는 마룻바닥의 기분 좋은 서늘함을 느끼고 싶을 때 꺼내보는 <여름은 그곳에 오래 남아>에 나오는 구절이다. 건축사무소 신입사원 사카니시가 여름별장 생활에 익숙해지는 장면이 행간에 그려진다. 처음과 시작의 덜컹거림. 스물에도, 나만의 가족을 꾸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비가 그친 기차역에는 남편과 아이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고작 하룻밤 떨어져 있었는데, 아이들은 달리기 시합을 하듯 뛰어와서 안겼다. 물기 머금은 공기와 익숙한 섬유유연제 향기가 뒤섞여 풍겨왔다. 그나저나 일요일은 '약속 없는 날'인데 벌써 정오가 지나버렸다. 첫째 아이가 주 7일 외출을 하길래,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만든 날이다. 최대한 육아에 힘을 빼고 단골 카페에서 계절메뉴를 즐긴다. 우리는 망고빙수를 앞에 두고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눴다. 내 친구들 근황 이야기도. 점점 경계가 흐릿해져 나와 남편, 아이의 친구 모두가 '우리'의 친구가 되어간다.


"박새의 가슴께에 흑백으로 그려진 무늬는 왜 그렇게 생겼는지, 각각의 개체로는 알 수 없을 것이다. 형태나 색은 그것을 지니는 자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먼 옛날부터 시간을 들여 찾아왔고, 그냥 계승되어 가는 것이다."


덜컹거리던 스무 살 경험이 완벽보다 '계속이 낫다'는 걸 알려줬다. 무엇을 하건 이 순간은 실패가 아니라 계승될 것이다. 이왕이면 마주 앉아 웃고 떠드는 순간이 많았으면.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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