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에 스미는 무용한 멜로디

<밤은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 이도우, 위즈덤하우스

by 정다

출퇴근을 아이와 함께 하는 삶은 여가를 즐길 만큼 여유롭지 않다. 아이는 2층 어린이집으로 나는 5층 사무실로 간다. 하루 중 오롯한 내 몫은 점심시간이다. 독서나 운동을 했었는데 작년 가을부터는 피아노실에 간다. 초등학생인 첫째 아이에게 리코더를 가르쳐주다가 문득 유년기에 피아노를 쳤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어찌 된 일인지 나는 유년기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얼마 없는 기억 중에 피아노 학원이 있다. 하늘거리는 쉬폰 원피스가 어울리는 차분한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이 건반 하나를 툭 치면 내가 오선지에 음표를 그리곤 했었다. 다 틀려도 선생님은 다정하게 알려주셨다. 선생님 남편은 독일인이었는데, 스칠 때마다 싱긋 웃는 얼굴로 독일어를 알려주곤 했다. 구텐탁 같은. 피아노 학원은 똑딱거리는 아날로그 메트로놈처럼 안정감을 주는 곳이었다.


다시 찾은 피아노 학원에는 자신을 연주자라고 소개하는 엄씨 성을 가진 남자 선생님이 있었다. 엄 선생님의 손가락은 짧고 통통했고, 건조한 겨울에는 손등이 하얗게 트기도 하더라. 속으로 내가 아는 피아니스트랑 다른 모습이군 했다. 손가락만 그런 건 아니었다. 반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레슨 시간을 모르겠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아마 정오로 정했던 것 같다. 엄 선생님이 12시까지 레슨실에 나오는 날은 거의 없었다. 처음에는 회의시간 5분 전에는 무조건 앉아 있는 내 성격과 달라서 거슬렸지만 이제는 연습하고 있으면 선생님이 오시겠거니 믿는다. 시간에 예민한 내가 너그러워진 이유는 설명하기 어렵다.


살면서 <재능 있다>는 말을 처음 들어봐서 그런가. 엄 선생님이 시범 연주를 하고 나면 내가 따라 쳤다.

"타고났어요. 어릴 때부터 쳤으면 좋았을 텐데. 아까운 재능이에요."

사실 나는 악보 보는 법도 까먹어서 피아노가 처음이라고 했었다. 진짜 피아노가 처음이냐는 질문을 열 번쯤 받았을 때 사실 이십 년도 더 전에 배운 적이 있다는 고백을 했다. 엄 선생님은 내가 피아노 천재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는 듯 '아'하는 낮은 소리를 냈다. 이어서 머리는 잊었어도 손이 기억하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 레슨 없는 어느 날에 각자 연습을 하다가 선생님이 갑자기 물었다.

"어렸을 때 피아노 왜 그만 쳤어요?"

"입시 준비해야 돼서요."

엄 선생님은 '어?' 하다가 3초 뒤에야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엄 선생님은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몰래 생각했다. 피아니스트이면서 입시 피아노를 가르치는 분이 '다른' 입시 준비로 피아노를 그만둔 학생의 세계를 알기란 어려울 테니까. 사실 입시 준비라는 대답도 어른이 된 내 해석일 뿐이다. 자유분방한 엄 선생님과 시간을 아껴 쓰는 나는 다른 별에 살다가 피아노 앞에서 잠깐 접선하는 사이 같다. 오선지에 그려진 음표대로 건반을 눌러보기 위해서.


대개 점심시간에 피아노실은 불이 꺼진 채 잠겨있다. 외워버린 비밀번호 네 자리를 누르고 들어가 피아노만 비추는 노란 조명 딱 한 개만 켠다.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 <사랑의 기쁨>을 연주한다. 박자대로 움직이지 않는 왼손가락만 몇 번이고 연습하다가 재능이란 낱말이 머리를 스친다. 선생님 저 피아노 재능은 아닌 것 같은데요, 하면서 피식 웃음이 났다. 이게 뭐라고 이토록 열심일까. 아무 목적도 없는 일인데. 아마 그렇기 때문에 행위 자체가 순수한 기쁨이 되는 것 같다. 나만을 위한 연주를 손끝으로 만들어내는 일. 무용함을 즐길 줄 아는 게 진짜 내 재능은 아닐까.


이도우 작가의 에세이집 <밤은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에서 '그녀들의 피아노' 꼭지에 보태고 싶은 이야기였다.

"돌이켜보면 나는 피아노라는 악기에 복잡한 감정이 있다. (...) 잃어버린 시절의 꿈같은 것이 묻어 있다. 지금처럼 취미가 다양하지 않았고 배울 수 있는 것들이 한정돼 있던 나날에 피아오는 그 무엇을 대표하는 악기였던 것 같다. 너무나 흔하지만 그렇기에 사연이 많은, 가깝고도 먼 사물. 새벽에 잠이 깨어 멍하니 떠올려보는 그녀들의 피아노."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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