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상실되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

존 디디온 <푸른 밤>, 뮤진트리

by 정다

콧속에 뾰루지가 났다. 아니 사라진 지 며칠이나 됐다고 또? 덕분에 나는 코를 자주 만지는 습관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코끝을 스치기만 해도 통증에 얼굴이 찡그려진다. 날 잡아 하루는 거울 앞에서 뾰루지를 찾아봤다. 이 정도로 아프다면 노랗게 곪아 있을 게 분명했다. 차라리 터트리는 게 낫지. 한참을 들여다봤지만 뾰루지는 못 찾았다. 대신 콧속 피부가 한 겹 벗겨진 것처럼 붉었다. 콧속이 헐었나 보다. 검색해 보니 원인은 면역력이 떨어져서라고 한다. 잘 먹고 잘 자기로 다짐했다. 분명히 마음은 먹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채로 며칠이 흘렀다. 목이 부었고 온몸이 부스러지게 아팠다. 오랜만에 병에 걸렸다. 밤새 이불을 뒤집어쓰고 끙끙 앓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날은 밝았고 주말 아침 식사 당번은 나였다. 약상자에서 이부프로펜 한 알을 꿀떡 삼키고 요리를 시작했다. 식사빵 한 덩어리를 오븐에 데우고 달걀을 휘휘 저어 스크램블하고 베이컨을 구웠다. 수박이랑 복숭아도 작게 썰어 접시에 담았다. 우리 집에서 즐기는 작은 조식 뷔페다. 주말 아침은 애정하는 시간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평소 건강할 때였다. 작은 입으로 오물거리는 아이들의 식사 속도는 유독 늦었고 남편은 말이 너무 많았다. 식사가 끝나자마자 남편에게 침대에 좀 누워있겠다는 말을 하고 방문을 닫았다.


약기운일까. 금세 잠이 들었는데, 남편이 거실에서 이제 그만 나오라고 소리쳐서 깼다.

"아우 나 정말 아프다고"

"왜 짜증을 내"

호응 되지 않는 대화에 힘이 불끈 났다. 아프다는 사람한테 왜 짜증을 내냐고 묻는 것인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갔다. 거실이 아닌 욕실로. 땀을 씻어내고 머리카락을 말리면서 마음을 정돈해 봤다.


첫 번째 섭섭하다. 남편이랑 아이는 작은 상처만 생겨도 내 앞으로 쪼르르 달려와서 약 바르고 밴드를 붙여달라고 하면서 내가 아픈데 괜찮냐고 묻지도 않는다. 둘째 이건 내 고질적인 문제다. 나는 아프다는 말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한다. 눈 뜨자마자 아프다고 집안 방송을 했으면 서로 편했을 텐데 그 말이 싫어서 꾹 참았다가 짜증이 나는 거다. 셋째 이제 어쩔 텐가. 일단 얼굴을 봐야겠지.


거실에서 남편과 첫째 아이는 새로 산 3D 나무 퍼즐을 맞추고 있고 둘째 아이는 둘을 방해하고 있었다. 남편이 나를 크게 부른 이유가 있었구나.

"우리는 젠가 하자"

내 말에 둘째 아이는 방긋 웃으며 젠가를 꺼내왔다. 젠가가 와르르 무너질 때마다 머리가 울렸다. 아이의 꺄르르 웃는 소리는 좋았지만, 그저 눕고만 싶었다. 남편 뒤통수에 아프다고 속삭였다.


남편은 아이들이랑 짜파게티를 끓여 먹고 아파트 바닥분수로 후다닥 나갔다. 드디어 혼자가 되었다. 일순간 고요해진 집 안이 좋으면서 두려웠다. 존 디디온의 <푸른 밤>처럼.

"푸른 밤 동안에는 하루의 끝이 결코 오지 않을 것 같다. 푸른 밤이 끝나갈 즈음이면(끝은 오게 되어있고 반드시 온다) 한기와 함께 혹시 몸이 아픈 것일까 하는 우려가 찾아든다. 그리고 푸른 밤이 사라지고 있음을, 이미 해가 짧아지고 있음을, 여름이 떠나버렸음을 깨닫는다. (...) 푸른 밤은 빛의 소멸의 반대인 동시에 그 경고이기도 한 것이다."


겨우 감기 몸살일 거야. 큰 병이면 어쩌지. 난 아직 저들을 오랫동안 돌봐주고 싶은데. 오물거리는 아이의 작은 입도 계속 보고 싶고, 뭔지 모르겠지만 남편은 나한테 할 말이 많을 텐데. 와르르 꺄르르. 밀려드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무거운 잠이 들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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