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린 마일스 <낭비와 베끼기>, 디플롯
"왜 글을 쓰느냐고 묻는다면, 그 답은 내가 세계에 존재하며 느끼는 이 깊은 편안함/불편함, 그리고 전념이라는 선택지와 관련 있을 터다." _ <낭비와 베끼기>, 아일린 마일스
일 년간 육아휴직을 하고 복직한 첫날 조 부장과 박 팀장은 나를 원탁으로 불렀다.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조 부장부터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일찍 복직했어. 조금 더 쉬지."
지난 일 년을 빠르게 복기했지만 쉼은 없었다. 더운 김이 올라오는 동그란 종이컵만 내려다보았다. 그때 박 팀장이 치고 들어왔다.
"왜긴 왜예요, 돈 벌어야죠."
빤히 다 안다는 듯한 박 팀장의 뉘앙스에 내 얼굴이 후끈거렸다. 육아휴직 일 년을 신청했고, 그저 복귀일이 도래해서 출근했을 뿐인데 구구절절 사연이 필요한 일이었나. 오늘 처음 본 사이인데 다들 왜 이러실까. 녹록지 않은 워킹맘 생활을 예감했다.
내게 일 년은 뱃속에 있던 아기가 아장아장 걸어서 어린이집에 갈 정도로 긴 시간이었는데 업무는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개정된 법령을 몇 가지를 익히고 하던 대로 통계 작업을 했다. 아이 이유식 먹이기 보다 쉬웠다. 서너 번 결재를 받고 나자 박 팀장은 묵은 일을 맡기기 시작했다. 시시각각 떨어지는 급한 일도 맡겼다. 일은 기한 내에 처리했고 퇴근은 정시에 누구보다 빠르게 했다. 애 엄마라서 칼 같은 퇴근을 했고, 애 엄마라서 업무에 완벽을 기했다. 일보다 애가 우선이라는 둥 자존심 상하는 평가를 받고 싶지 않았다.
모두가 점심을 먹으러 나간 고요한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가 밥은 먹어야지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조 부장이 파티션 뒤, 자기 자리에 혼자 앉아있었다.
"부장님 식사하셨어요? 저는 구내식당 가려고요."
조 부장은 같이 가자고 흔쾌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어색한 공기를 마시며 혼자 먹을 걸, 약간 후회했다. 침묵을 깨고 조 부장은 이미 동료들에게 열 번도 넘게 받은 식상한 질문을 했다.
"둘째 계획은 있어?"
도대체 사람들은 왜 그리 둘째 계획을 물을까. 인사말인가. '안녕하세요'처럼. 그렇다면 예의상 똑같이 돌려드려야겠다.
"부장님은요?"
"우리 아들 중학생이야. 아이를 하나 더 낳고 싶었는데, 집사람이 산후우울증이 심하게 앓았어. 맞벌이에 주말부부라서 집사람이 고생을 많이 했지. 은행에 다니는데 출산하고 길게 휴가를 내지도 못했어. 그렇다고 내가 육아를 도맡아서 할 형편도 아니었고. 아직도 아쉬움이 남아서 자꾸 다른 사람의 둘째 계획을 묻게 되네."
뭐야. 둘째 계획은 정말로 안녕하세요 같은 인사말이었던 건가. 식당에서도 조 부장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지난 주말 아들과 함께 운동하러 간 이야기. 아들은 평소에 대답도 잘 안 하는데 그날은 적극적으로 따라나섰다고 한다. 얘가 웬일이지 하며 기분 좋게 데리고 나갔는데 공원에 도착하자마자 아들은 벤치에 앉아서 조 부장의 휴대폰으로 게임을 시작했고, 조 부장은 공원을 혼자 뛰었다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먹는 조 부장이 말이랑 속내가 똑같은 순수한 중학생 아버지로 보였다. 출근 첫날에 '조금 더 쉬다 오지'라는 말의 의미는 진심으로 내가 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 소리였던 건가.
하나 키우기도 버거운 내게 둘째가 생겼다. 계획도 없이. 5살 터울이라 첫째 아이 학교 가는 시점도 맞물리고 해서 두 번째 육아휴직은 3년을 냈다. 회사를 가지 않는 시기에 은근 박팀장을 자주 봤다. 어린이집에서, 장난감 도서관에서. 스칠 때마다 박 팀장은 할 말이 많았다.
"애는 잠드는 게 왜 그렇게 오래 걸리니? 내가 등하원이랑 목욕이랑 재우기를 담당하고 있는데 어우 너무 피곤해. 너는 이걸 어떻게 했어? 젊어서 괜찮았나?"
원래 박 팀장과 나 사이에는 일이 놓여있고 검토와 결정이라는 업무분장이 있었는데, 어린이집 학부모로 만나니 전혀 다른 관계로 맺어졌다.
"우리 와이프 다큐멘터리 작가거든. 프리랜서라서 일이 불규칙한데 한번 일을 시작하면 밤낮이 없어. 그렇다고 일을 쉬면 원할 때 다시 시작할 수 없는 분야이기도 하대."
작가라니 너무 멋지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애 둘을 키우느라 나도 정신이 없어서 박 팀장 처지에 깊이 공감하긴 힘들었다.
"힘내세요, 잘하고 있어요."
그쪽인지 이쪽인지 모를 응원만 건네고 헤어졌다. 집으로 가는 길에 박 팀장은 사무실로 진짜 '돈을 벌러' 출근했겠구나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