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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텔 Jan 04. 2021

그 많던 나이는 누가 다 먹었나

2W MAGAZINE Vol.7 여자 나이

*본 글은 1인 전자책 출판사 아미가에서 매달 발행하는 웹진 2W MAGAZINE 1월호에 

실린 에세이입니다. 알라딘, 예스24, 교보문고, 리디북스, 네이버 시리즈 등의 이북을 볼 수 있는 플랫폼이라면 어디서든 1,000원에 판매되고 있으며 보다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께선 구매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1986년생, 35. 이제 해가 바뀌면 36.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인정해야 한다. 나는 30대 후반에 접어들었고 몇 년 있으면 40이 된다. 10대였을 때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던 숫자가 턱 밑으로 바짝 다가섰다. 33살 무렵부터는 마음 한구석에 두려움이 나이와 함께 켜켜이 쌓이고 있는 중이다. 통장 잔고는 하찮고 내세울 만한 경력도 없고 학력은 말할 것도 없다. 물가는 계속해서 상승 중이고 아파트 임대료는 꼬박꼬박 오르는데 연봉은 몇년째 그대로다. 몸값을 올려서 이직하고 싶어도 내가 내밀 수 있는 조건은 너무나 보잘것없다. 그 무엇 하나 자신만만하게 내세울 수 있는 나만의 무기가 하나도 없는 셈이다. 나이라도 어렸으면 무턱대고 어디 신입이나 인턴을 노려볼 수 있겠지만 36의 나이는 그 어디서도 신입으로 받아주지 않는 나이이다. 꼭 한번 일해보고 싶은 직군이 있다. 2020년 한 해 동안 채용공고가 올라올 때마다 이력서를 넣었다. 넣는 회사마다 서류도 넘지 못하고 탈락했다. 반드시 나이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나이도 한몫했을 거라는 데에 주머니 속 500원도 걸 수 있다. 내 나이는 그런 나이다. 성별 탓도 조금 있을 것 같다. 여자 나이 36인데 결혼을 안 했다고 하면 언제고 결혼할지 모르는 나이. 

그래서 이 나이에 이직한다고 하면 동종업계로 경력직 팀장, 매니저 등의 관리직으로 들어가거나 회사를 그만두고 자기 사업을 시작하거나 둘 중의 하나일 테다. 없는 길을 만드는 이도 분명 있겠지만 나는 그런 부류의 사람은 아니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 보면 스스로가 너무 쓸모없는 사람인 것 같아서 괴롭다. 환경오염 문제가 전 지구적으로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는 현재,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플라스틱 쓰레기를 끊임없이 생산하는 것 말고는 없는 것 같다는 생각에 미치면 견딜 수가 없다. 할 수 있는 일이 겨우 이따위밖에 없나 싶어서 끝없이 우울해지고야 만다. 


나는 대체 이 나이 될 때까지 무얼 하면서 살아온 걸까. 몇 년 전, 수많은 사회초년생을 미생으로 만들었던 드라마가 있다. 동명의 웹툰이 원작인 이 드라마는 대기업에 낙하산으로 입사해 계약직 직원이 된 장그래를 그리고 있는데 작 중 김동식 대리는 장그래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이 27개 먹을 동안 할 줄 아는 거 하나 없이 뭐 했어?” 장그래는 고작 27살인데 해놓은 게 없다고 타박받았다. 나는 장그래보다 9살은 더 먹었는데 그렇다면 나는 대체 김대리에게 무슨 변명을 할 수 있을까. 이 드라마가 방영될 당시 내 나이는 29이었다. 그때도 이미 장그래보다 2살이 많았다. 30을 1년 앞두고 심란했던 것도 같다. 27살의 장그래는 사실 이미 한 번 치열하게 살아본 사람이다. 본인이 이루고자 하는 목표에 닿지 못해서 튕겨 나왔을 뿐 해놓은 게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장그래가 새로 속하게 된 조직에서 당장 써먹을 수 없었을 뿐이다. 그런데 나는 미생의 주인공처럼 치열하게 무언가를 탐해본 적이 없다. 일로도, 취미로도. 누굴 탓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면서 기어이 남 탓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게 또 인간이라. 나는 결국 그저 그런 인간에 지나지 않아서. 내 탓만 하면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엄마를 탓하고 환경을 탓해버리고 만다. 정말 별로다. 알고 있다. 그런데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끊임없이 나 외의 다른 탓할 거리를 찾아낸다. 도대체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을까 생각해보려고 하면 너무 아득하다. 10대, 20대가 꼭 전생에 있었던 일처럼 현실성이 없다. 과거를 떠올리려고 하면 내가 겪었던 일을 기억해내는 개념보다는 극장 안 관객이 영화 관람하듯이 복기하는 개념에 더 가깝다. 꼭 남의 일처럼 그렇게 떠올리게 된다. 

40대가 됐을 때의 나, 50대가 됐을 때의 내 모습이 전혀 그려지지 않는다. 지금처럼 살아서는 제대로 나잇값 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을 늘 밑에 깔고 있다. 그래서 그나마 젊고 건강한 지금 내 의지로 내 생을 마감하고 싶은 마음과 어떻게 어떻게든 잘 버텨서 무사히 할머니가 되고 싶은 마음이 매 순간 오락가락한다. 


MBC 예능 무한도전에 나왔던 어느 아주머니의 한마디가 뼈에 사무치는 그런 나이가 되었다. 지금 당장 필요하신 게 뭐냐는 유재석의 질문에 아주머니는 대답했다. “나이 들수록 여자에게 필요한 건 돈이겠지....” 방송 당시에는 몰랐는데 이쯤 되고 보니까 우문현답이라는 걸 아주 잘 알겠다. 여자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돈이 필요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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