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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텔 Nov 02. 2021

스칼렛 오하라는 내일의 태양을...

2W MAGAZINE Vol.17 아픔의 기억

*본 글은 1인 전자책 출판사 아미가에서 매달 발행하는 웹진 2W MAGAZINE 11월호에 

실린 에세이입니다. 알라딘, 예스24, 교보문고, 리디북스, 네이버 시리즈 등의 이북을 볼 수 있는 플랫폼이라면 어디서든 1,000원에 판매되고 있으며 보다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께선 구매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스칼렛 오하라는 내일의 태양을 기대하고 나는 오늘의 달밤을 걱정하고


흔히들 말하곤 한다. 계속 살다 보면, 버티다 보면 좋은 날이 반드시 온다고.

나는 이 문장을 절반만 믿는다. 절반은 믿지 않는다. 모순적으로 보여도 할 수 없다. 

사람 마음은 정답이 있는 수학 문제가 아니라서 어떤 면에선 모순적일 수 밖에 없다.

다만 나는 모순 투성이로 뭉쳐진 사람인 것이다.


절반은 믿고 절반은 믿지 않는 이유는 

그저 살고자 할 뿐인데 그게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울 일인가 싶을 때가 있는 반면

살아 있으니 이런 일도 있네 싶은 때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살아 숨 쉬는 일이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울 필요가 있는가, 하는 순간이 압도적으로 많은 게 문제라면 문제일 것이다.


어떤 날은 잘 버틸 수 있을 것 같고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가도 

어떤 날은 지금 당장 아파트 베란다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지고 싶은 마음이 매일 매 순간 교차한다. 

먼지처럼 흔적도 남기지 않고 흩날려 사라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진작 그렇게 했을 것이다.

나는 죽고 싶고 죽고 싶은 만큼 악착같이 살고 싶다. 


잠자리에 누워 다음 날을 생각하면 숨을 쉬기가 괴롭다. 

매일매일 아침이 반복되는 게 끔찍해서 억지로 긴 밤을 붙들어 보려고 휴대폰 불빛에 의지한 채 

뒤척이다가 겨우 잠드는 날이 쉴 새 없이 많은데 이렇게까지 목숨을 연명해야 하는 이유를 

아직 찾지 못했다. 

태어난 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스스로가 태어남을 선택할 수 없다지만

이건 조금 잔인하지 않나.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이후의 생을 온전히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게.


이런 생각을 수 없이 하면서도 아직까지 살아있는 이유는 내가 겁쟁이라서. 용기가 없어서.

죽고자 마음 먹었을 때, 그래서 그를 실행에 옮길 때 죽기 전까지 감내해야 할 고통이 두렵고 

목숨을 저버릴 마음을 먹는 게 무서워서.

그리고 이대로 세상에서 사라지면 너무 억울할 것 같아서.

그래서다.


어떻게든 살고 싶은 마음이 삐죽 올라오면 내 목숨에 어떤 가치가 있을지 고민한다.


북극의 얼음은 계속해서 녹고 있고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지구에 실시간으로 위협이 되고 있으며 

썩지 않고 녹지 않는 플라스틱과 비닐 사용량은 줄지 않아 땅과 바다를 성실하게 오염시키고 있는데 

나는 이 모든 문제에서 빠지지 않고 1인분을 더하고 있다. 

지구에 위기를 1인분씩 분, 초 단위로 안겨주고 있는 셈인데 내 존재가 이걸 다 감수할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일까. 살아있음으로 인해 끊임없이 행성에 위협을 가하고 있는데 이 모든 일이 내 목숨과 맞바꿀 만한 목숨인가. 그저 1인분의 플라스틱 쓰레기와 비닐과 이산화탄소 배출 말고는 할 줄 아는게 없는데.


나는 대체 무엇일까. 

내가 뭘 잘하고 뭘 할 수 있고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모르겠다.

그저 태어났으니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역시 이건 좀 잔인하다.

나는 왜 살고 싶을까. 그저 죽는 게 무서워서, 그 뿐일까.


정말이지 매일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떠오르는 태양이 야속하다.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하루를 활기차게 시작하는 영화, 드라마 속 주인공들을 생각해본다. 

대표적으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가 있다. 

그는 절망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내일의 태양을 기대하지만 

나는 오늘 하루를 버텨낸 것만으로 힘에 부쳐 다가올 내일이 끔찍하다. 


다람쥐 챗바퀴도 이것보다는 즐거울 테다.


그리스로마 신화 속 시시포스를 생각해본다.

그는 가파른 언덕위로 바윗돌을 굴려 올린다. 돌과 함께 정상에 다다르면 그 돌은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그럼 다시 밑에서부터 돌을 정상으로 굴려야 한다. 저승의 형벌이다.


나는 가끔 시시포스와 내 처지가 대체 무엇이 다른가 생각해본다.

시시포스가 조금 더 낫지 않나 싶은 생각도 더러 하는데 어쨌든 그는 정상에 다다를 수 있다. 정상에 머무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정상이 있다. 다시 밑으로 굴러 떨어진다 하더라도 끝이 보인다. 


나는 끝을 알 수 없어 고통스럽다. 나에게도 정상에 다다를 수 있는 순간이 있을까.

내 삶에서 정상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있기는 할까. 


나는 틀림없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데 낫게 해보려고 무던히 애를 썼지만 내 정성이 부족했던 걸까.

아니면 찾아간 곳들이 엉터리였을까. 그 분들은 나름대로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공부했고 노력했기 때문에 그 자리까지 다다른 것일텐데. 내가 뭐라고 이 사람들을 엉터리라고 욕할 수 있을까.

그냥, 역시 내 정성이 부족했던 것이다. 결국 다시 주사위는 나한테로 굴러온다.


내가 문제다. 

이런 결론 외에는 다른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내가 살아 숨쉬는 게 문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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