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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텔 Feb 14. 2022

나이 서른이 내게도 축복이었더라면

자격지심에 불과하지만...

연예인 혹은 유명한 인플루언서들이 가끔 하는 말들 중에 유달리 셈나는 말이 있다.

나이 서른, 마흔 되어서 너무 좋고 안정적이고 여유도 생겼고 왜 더 빨리 이 나이가 안 됐는지 모르겠다며 웃는 그들의 말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나는 내 못난 자격지심이라는 걸 알면서도 질투심이 뱃속부터 피어오른다. 내 나이 서른은 진작에 넘겼고 마흔이 몇 년 안 남았는데 여전히 불안정하고 불안하고 먹고 살기에 급급하고 여유는 개뿔, 매일 매순간 매분 전전긍긍하고 있다. 나도 서른의 나이를, 다가올 마흔을 기대하며 설레하고 싶다. 너무 간절하다. 


그러지 못하는 건 내가 잘못 살아온 탓일까. 그저 살고자 했을 뿐인데. 하루를 간신히 버티고 불안한 새벽을 지나 날카롭고 잔인한 아침을 견뎌 살아냈을 뿐인데. 살아 남기 위한 삶을 살았던 게 잘못이었을까. 


작년 연말에 마음을 다잡고 심리상담을 다시 시작했다. 앞선 두번의 상담 실패 이후 몇년만에. 

아직까지는 잘 해오고 있다. 최근 상담에서 두서없이 신세 한탄 하면서 이 비슷한 말을 했더니 가만 듣고 있던 선생님은 나에게 지금까지 살아낸 것도 결코 쉬운 게 아니고 대단한 거라더라. 그러니 스스로에게 화나는 마음보다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을 더 살피면 좋겠다고. 

하지만 난 상담자의 이런 대답이 그저 본인이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더 크게 받고 있을 뿐이다. 업무적인 응대 매뉴얼에 따라 날 사무적으로 대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인터넷 쇼핑몰의 인바운드 상담사가 소비자의 항의에 주어진 답변 중 하나를 골라 말하듯이. 

비뚫어진 마음에 불과하다는 걸 그 누구보다 내 스스로 잘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삐딱하게 생각하고 마는 것이다. 모순적이게도 비틀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면서 한편에선 기대고 싶고 위로 받고 싶어진다. 정말 하나만 했으면 좋겠는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


끊임없이 나의 존재 이유를, 내 쓸모를, 내 목숨의 가치를 따져본다. 내가 이 지구상에 발딛고 있어야 할 이유를. 이산화탄소와 플라스틱 쓰레기를 지구에 보태기만 할 뿐 이로움을 주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지구에도 나에게도 이유가 될 수 없다. 내 쓸모없음을 더 공고히 다져줄 뿐이다. 이런 생각을 안 하려고 해도 쉽지 않다. 


내가 하는 일은 남들도 다 할 수 있는 일들이다. 나만이 특별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내 특기, 남들보다는 내가 조금 더 잘 할 수 있는 일이란 도대체 뭘까. 그런 게 있기는 한가. 나의 필요성을 증명할 수 있는 달란트를 난 가지고 있지 않다.


지금은 처방전에 없지만 병원에 처음 갔을 때 수개월 정도 복용한 수면보조제가 있었다. 아티반정이라는 이름의 동그랗고 납작한 작은 알약. 조석으로 매일 약을 챙겨먹는다는 게 생각보다 많은 공력을 들어야 하는 일이었고 루틴으로 자리잡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때를 놓쳐 먹지 못한 약들이 한웅큼 남았는데 이런 양약은 일반쓰레기로 버리면 안 된다는 얘길 들은 기억이 나서 한데 모아두었다. 아티반정도 섞여있다. 

이걸 굳이 한데 모아둔데는 조금 더 복잡한 이유가 있는데 소분된 사각 약봉투가 점점 많아져서 이대로 두면 부피가 커져 언젠가는 엄마 눈에 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봉투를 뜯어 다이소에서 구매한 플라스틱 통에 담아뒀다. 온갖 약이 한데 모여져 있으니 꼭 맛이 다른 사탕처럼 보이기도 한다. 


삶이 고통스럽고 내일 아침을 맞이하는 게 두려워질 때면 꺼내서 가만히 바라본다. 이걸 한 번에 삼키면 원하는 대로 고통없이 목숨을 끊을 수 있는지. 재수없게 살아남아 병원 응급실에서 눈을 뜬다면 걷잡을 수 없이 큰 일이 되어버릴텐데. 어떻게 하면 한 번에 깔끔하게 생을 마감할 수 있는지.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생각을 수없이 하다보면 도리어 살고 싶어진다. 깔끔한 죽음을 원했는데 어설프게 살아남아버리면 그보다 끔찍한 일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삶도 죽음도 어쩌면 이렇게 내가 원하는 대로는 안 되는 건지. 얄궂을 뿐이다.


몇년 뒤의 마흔은 내가 부러워하던 이들처럼 나 역시 마흔을 축복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하기는 한 일인가. 그 쯤이면 나는 내 삶의 이유를 찾았을까.

아직까지는 요원하기만 한데.

나에게도 평화가 찾아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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