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격지심에 불과하지만...
연예인 혹은 유명한 인플루언서들이 가끔 하는 말들 중에 유달리 셈나는 말이 있다.
나이 서른, 마흔 되어서 너무 좋고 안정적이고 여유도 생겼고 왜 더 빨리 이 나이가 안 됐는지 모르겠다며 웃는 그들의 말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나는 내 못난 자격지심이라는 걸 알면서도 질투심이 뱃속부터 피어오른다. 내 나이 서른은 진작에 넘겼고 마흔이 몇 년 안 남았는데 여전히 불안정하고 불안하고 먹고 살기에 급급하고 여유는 개뿔, 매일 매순간 매분 전전긍긍하고 있다. 나도 서른의 나이를, 다가올 마흔을 기대하며 설레하고 싶다. 너무 간절하다.
그러지 못하는 건 내가 잘못 살아온 탓일까. 그저 살고자 했을 뿐인데. 하루를 간신히 버티고 불안한 새벽을 지나 날카롭고 잔인한 아침을 견뎌 살아냈을 뿐인데. 살아 남기 위한 삶을 살았던 게 잘못이었을까.
작년 연말에 마음을 다잡고 심리상담을 다시 시작했다. 앞선 두번의 상담 실패 이후 몇년만에.
아직까지는 잘 해오고 있다. 최근 상담에서 두서없이 신세 한탄 하면서 이 비슷한 말을 했더니 가만 듣고 있던 선생님은 나에게 지금까지 살아낸 것도 결코 쉬운 게 아니고 대단한 거라더라. 그러니 스스로에게 화나는 마음보다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을 더 살피면 좋겠다고.
하지만 난 상담자의 이런 대답이 그저 본인이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더 크게 받고 있을 뿐이다. 업무적인 응대 매뉴얼에 따라 날 사무적으로 대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인터넷 쇼핑몰의 인바운드 상담사가 소비자의 항의에 주어진 답변 중 하나를 골라 말하듯이.
비뚫어진 마음에 불과하다는 걸 그 누구보다 내 스스로 잘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삐딱하게 생각하고 마는 것이다. 모순적이게도 비틀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면서 한편에선 기대고 싶고 위로 받고 싶어진다. 정말 하나만 했으면 좋겠는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
끊임없이 나의 존재 이유를, 내 쓸모를, 내 목숨의 가치를 따져본다. 내가 이 지구상에 발딛고 있어야 할 이유를. 이산화탄소와 플라스틱 쓰레기를 지구에 보태기만 할 뿐 이로움을 주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지구에도 나에게도 이유가 될 수 없다. 내 쓸모없음을 더 공고히 다져줄 뿐이다. 이런 생각을 안 하려고 해도 쉽지 않다.
내가 하는 일은 남들도 다 할 수 있는 일들이다. 나만이 특별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내 특기, 남들보다는 내가 조금 더 잘 할 수 있는 일이란 도대체 뭘까. 그런 게 있기는 한가. 나의 필요성을 증명할 수 있는 달란트를 난 가지고 있지 않다.
지금은 처방전에 없지만 병원에 처음 갔을 때 수개월 정도 복용한 수면보조제가 있었다. 아티반정이라는 이름의 동그랗고 납작한 작은 알약. 조석으로 매일 약을 챙겨먹는다는 게 생각보다 많은 공력을 들어야 하는 일이었고 루틴으로 자리잡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때를 놓쳐 먹지 못한 약들이 한웅큼 남았는데 이런 양약은 일반쓰레기로 버리면 안 된다는 얘길 들은 기억이 나서 한데 모아두었다. 아티반정도 섞여있다.
이걸 굳이 한데 모아둔데는 조금 더 복잡한 이유가 있는데 소분된 사각 약봉투가 점점 많아져서 이대로 두면 부피가 커져 언젠가는 엄마 눈에 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봉투를 뜯어 다이소에서 구매한 플라스틱 통에 담아뒀다. 온갖 약이 한데 모여져 있으니 꼭 맛이 다른 사탕처럼 보이기도 한다.
삶이 고통스럽고 내일 아침을 맞이하는 게 두려워질 때면 꺼내서 가만히 바라본다. 이걸 한 번에 삼키면 원하는 대로 고통없이 목숨을 끊을 수 있는지. 재수없게 살아남아 병원 응급실에서 눈을 뜬다면 걷잡을 수 없이 큰 일이 되어버릴텐데. 어떻게 하면 한 번에 깔끔하게 생을 마감할 수 있는지.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생각을 수없이 하다보면 도리어 살고 싶어진다. 깔끔한 죽음을 원했는데 어설프게 살아남아버리면 그보다 끔찍한 일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삶도 죽음도 어쩌면 이렇게 내가 원하는 대로는 안 되는 건지. 얄궂을 뿐이다.
몇년 뒤의 마흔은 내가 부러워하던 이들처럼 나 역시 마흔을 축복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하기는 한 일인가. 그 쯤이면 나는 내 삶의 이유를 찾았을까.
아직까지는 요원하기만 한데.
나에게도 평화가 찾아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