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처 몰랐던 김밥천국에 대한 어떤 생각들
살림을 도맡아 하는 사람을 가장 분노케 하는 문장이 무엇일까.
내가 우리 집에서 살림에 참여하는 비율은 0에 수렴한다. 불효자식 맞다. 돈 벌어오는 가장노릇을 한다는 그럴듯한 핑계로 청소, 빨래, 요리를 엄마가 전담한다. 양심에 찔려서 설거지라도 내가 할라 치면 엄만 뭐가 그렇게 걱정되고 염려되는지 질색을 하면서 손사래를 치고 날 싱크대에서 쫓아낸다. 마치 벌레 쫓듯이 쫓아낸다. 이렇게까지 아연실색할 일인가 싶은데 엄마 눈엔 여전히 내가 살림바보로 보이나 보다. 완전히 아니라고 부정하긴 어려워도 설거지 정도는 할 수 있는데. 그냥, 아직 우리 엄마가 정정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될 것 같다. 집에서 뭘 많이 안 하는 대신 차려주는 밥은 군말 없이 그릇을 비운다. 반찬투정은 어릴 때도 커서도 해 본 일이 없다. 대신 나는 집에서 세탁과 건조가 어려운 무겁고 묵직한 세탁물이 있으면 한 짐을 이고 지고 동네 24시 무인세탁소에 다녀온다. 우리 집에 통돌이 세탁기는 있어도 건조기는 없기 때문이고, 세탁기가 있어도 구태여 손빨래를 고집하는 엄마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해 본다. 나는 입 밖으로 꺼내본 적 없는 말이지만, 아무래도 청소하고 밥하고 빨래하는 사람을 가장 화나게 하는 문장 중 하나는 '간단하게 김밥이나 해 먹을까?', '간단하게 국수로 때울까?'와 같은 말이 아닐까 하고.
한식은 손이 많이 간다. 정말 많이 간다. 내가 직접 요리해본 적은 다섯 손가락을 채우지 못할 만큼 적지만 옆에서 요리하는 엄마를 보면 알 수 있다. 많고 많은 요리 예능 프로를 조금만 지켜봐도 그렇다. 종류가 뭐가 됐든 한식 앞에 '간단히'와 같은 부사는 나란히 있을 수 없다. 김밥은 말할 것도 없고(김밥은 먹기에나 간단하지 만들려고 하면 재료 준비로 진을 다 빼는 고난도 음식 중에 하나다. 우리가 김밥을 밖에서 쉽게 사 먹는다고 해서 과정도 쉽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자가 있거든 직접 만들어보길 바란다.) '간단하게'에 가장 많이 소환되는 국수도 막상 해보면 과정이 만만치 않다. 한식으ㅔ 기본이 되는 육수 맛 내기는 요리 초보가 하기엔 상당히 어렵다.
어릴 때 자주 찾던 외식 1순위는 김밥천국이었는데, 요즘도 종종 간다. 가성비 좋은 한식을 먹고 싶을 때 김밥천국만 한 선택지가 또 있겠는가. 김밥 종류는 물론이고 면, 밥, 분식, 일식, 중식 등 온갖 메뉴를 다양하게 만들어 판다. 어릴 때는 돈 없고 배고파서 자주 찾았는데(김밥이 한 줄에 천 원이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만나던 애인이랑 제일 많이 가던 곳이기도 했다. 양푼비빔밥을 시키면 커다란 양푼에 갖가지 재료가 수북이 쌓여있고 공깃밥 두 개와 된장찌개를 서비스로 내줬다. 만원이 안 되는 금액으로 둘이서 배를 채우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요즘은 양이 좀 줄었고 가격도 많이 올랐다.) 사회초년생과 대학생이 만나 연애하면서 갈 수 있는 제일 좋은 선택지였다. 지금 같은 고물가 시대에, 인건비 빼고 모든 것의 값이 치솟는 와중에도 김밥천국은 여전히 제일 만만한 외식장소다. 비록 김밥 한 줄의 가격이 내가 알던 가격보다 3배쯤 올랐지만 그래도 3,500원이다.
생각해 보면 김밥 한 줄을 만드는 데에 들이는 공력은 상당한데도 천 원에 팔던 시절은 가격이 다소 후려쳐진 면도 좀 있는 것 같다. 김밥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가격으로 치환하면 천 원, 가격을 올려도 삼천 원인가 보다.
동네마다 꼭 하나씩은 있는 김밥천국은 내게도 다양한 모양으로 기억에 남아있는데 나는 김밥천국을 보면 양가감정이 동시에 몰려온다. 서러움 혹은 기분 좋은 가성비외식이 그렇다. 일하다가 몰아닥친 서러움에 점심시간만이라도 회사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고 싶어 찾아간 김밥천국에 홀로 앉아 울면서 꾸역꾸역 밥알을 삼킨 날이 있는가 하면 매일 비슷비슷한 반찬이 나오는 구내식당이 지겨울 때 외식 기분 내면서 좋아하는 예능을 켜두고 즐겁게 식사한 날도 있다.
예상컨대 ‘간단하게 김밥이나 먹을까’의 주 원흉은 아무래도 김밥천국이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할 것 같다. 천 원이면 한 줄을 사 먹을 수 있는데 작은 용기에 된장국도 내준다. 천 원 내고 먹을 수 있는 집밥 같은 메뉴여서 집에서 살림 안 해본 사람들이 김밥 앞에 ‘간단하게’ 따위의 부사를 붙이나 보다.
소설 『김밥천국 가는 날』을 읽으면서, 책 속 주인공들이 먹는 메뉴를 나도 자연스레 떠올리면서, 나는 약간 당황스러웠다. 어렴풋이 가지고 있던 김밥천국에 대한 감상이 생각보다 다종다양했던 탓이다. 단순히 돈 없고 배고프면 찾던 곳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여겼는데 김밥천국에는 이럴 수가 있나 싶으리만치 내 삶의 희로애락이 많이 녹아있었다.
하루가 별날 것도 없이 재미없고 무기력할 때, 속이 허할 때, 지금 내가 지나고 있는 이 시간이 의미 없이 공허하기만 할 때, 나는 김밥천국을 찾는다.